안녕하세요. 민머리요정입니다.
어제 오전에 질문게시판에
박찬호 / 노모 / 다르빗슈 유 관련 질문글을 보고서,
이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작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대표적인 일본인 메이저리거 하면, 다르빗슈, 구로다가 생각나겠지만,
아직까지 저에게는 노모가 가장 인상깊습니다.

유년시절 일찌감치 야구를 시작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지만, 노모 히데오는 철저하게 무명이었습니다.
(이미 토네이도 투구폼은, 유년시절 완성된 폼으로, 직구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저렇게 던졌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역시, 약체 지역의 약체 고등학교, 세이조 공고에 진학.
2학년 시절 오사카 부 지역예선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기록도 있고,
3학년 때에는 학교를 지역 예선 16강에 진출시키기도 했지만, 고시엔 본선에는 올라가보지 못합니다.
이런 커리어로는 프로에 입단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프로에 지명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노모는 사회인야구 팀인 신일본제철에 입단하게 됩니다.
단, 자신의 투구폼에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는 조건과 함께 계약을 하게 됩니다.
(일본의 사회인야구팀은, 한국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도하 아시안게임의 참사 )

입단 첫 해에, 노모는, 자신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불리우는 포크볼을 배우게 됩니다.
감독은 대수롭지 않게 포크볼 그립을 가르쳐줬는데,
배운 이 시점부터, 노모는 이 포크볼을 파고, 또 파고, 연구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노모의 포크볼은 사회인 레벨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레벨이 되버립니다.
이후, 88년 서울 올림픽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거는 성과를 거두고,
자신의 이름을 일본 전역에 널리 알리게 됩니다.
(이때 같이 호흡을 맞춘 포수는, 컴퓨터 포수, 후루타 야쓰야 입니다.)

1989년에 진행된 드래프트에서, 일본 프로야구의 12팀 중 무려 8팀이 노모를 1순위로 지명하게 됩니다.
8구단의 지명을 받은 선수는 노모 히데오가 유일하며, 아직까지도 일본드래프트 사상 최고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노모를 지명하지 않은 팀은, 세이부, 주니치, 히로시마, 요미우리)
추첨을 통해서, 긴테쓰 버팔로우스가 우선 교섭권을 얻었고,
노모 쟁탈전에서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
노모 쟁탈전에서 패배한 요코하마는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컴퓨터 포수' 후루타 야쓰야를 지명하게 됩니다.
노모는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1억엔대 계약금(1억2000만엔)을 받고 긴테쓰에 입단하게 됩니다.
단, 자신의 투구폼에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는 조건과 함께 계약을 하게 됩니다.

1990년 일본리그에는 토네이도 열풍이 불게 됩니다.
데뷔 4번째 경기에서 프로 첫 승과 함께, 17개의 탈삼진으로, 일본야구 타이기록을 경신.
데뷔 첫해 28경기 선발로 등판하여, 21 완투.
완투에 실패한 7경기 중 1경기는 10회 2사에서 교체된 것으로, 노모는 경기당 8.38이닝을 던졌습니다.
데뷔 첫해 노모는
다승 (18승8패) 평균자책점(2.91) 탈삼진(235이닝 287삼진) 승률 / 4관왕이 되었고,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인왕 - 사와무라상 - MVP 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듬해에도, 노모는 29경기 선발로 등판하여, 22번 완투.
다시 다승과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31경기 17승11패 1세이브 3.05, 242이닝 287삼진).
1993년까지 4년 연속으로 다승과 탈삼진을 4연패했는데,
데뷔 첫 해부터 4년 연속 다승왕에 오른 투수는 NPB 역사상, 노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와 더불어, 4년 연속 최다 사사구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정말 많은 탈삼진을 잡는 능력 만큼이나, 볼넷도 많이 준 투수입니다.
(그 이유는, 결정구인 포크볼을 골라내면 볼넷이기 때문에.....)
일본프로야구 5년간,
139경기(134선발) 78승 46패 1세이브 80완투 13완봉 완투율 약 59.7%,
1051⅓이닝 / 1204탈삼진 / 588볼넷 / 방어율 3.15 의 말도 안되는 기록을 내게 됩니다.

90년 처음으로 출전한 미일올스타전에서, 내셔널리그 올스타 배리본즈를 상대로,
볼넷을 내주고, 만루상황에서 적시타를 맞는 등 완패하며, 메이저리그를 꿈꾸게 됩니다.
(이후 노모는,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2번 등판. 8타수 무안타 4삼진. 완벽하게 복수를 해냅니다.)
그리고 93년 출전한 미일올스타전에서 만나게 된 로저 클레멘스.
이미 3개의 사이영상을 수상했던 클레멘스가 노모에게 해준 '미국으로 와라'는 말.
이 말로부터, 노모는 메이저리그를 마음에 품게 됩니다.
데뷔 이후 4년동안 너무 많은 공을 던진 노모는,
94년 마침내 어깨에 무리가 오게 됩니다. (포크볼러의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이와 더불어 93년에 부임한 스즈키 게이시 감독은,
입단 당시 계약 조건을 깨고, 노모의 투구폼에 간섭을 하기 시작합니다.
현역 300승을 달성한 스즈키 감독은 노모가 8월에 부상을 당하자 "이제 그는 끝났다"고 발언합니다.
시즌이 막바지였던 10월1일 경기에서, 노모는 4회 머리에 타구를 맞고 교체. 두개골에 실금이 갔다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노모는 9일 경기에 자원으로 등판하여, 7⅓이닝 동안 144개의 공을 뿌렸고,
13일 경기에서도 10이닝 완투를 하면서 182개의 공을 투구. 17일에도 연장 10회까지 177개의 공을 뿌렸습니다.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9일 동안 3경기에 나서 503개의 공을 투구.
이는 스즈키 감독을 향한 메시지이자, 일본에서 보여준 마지막 투혼이자 작별인사로 남게 됩니다.
이후, 노모는 구단에 다년계약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은퇴한 선수는 어떤 팀에서도 뛸 수 있다'는 조항을 이용해 FA 자격을 얻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됩니다.
-> 이후 NPB측은 이 조항을 고쳤습니다.
* 이렇게 여러가지 감독과 얽힌 이 관계에 있어서, 메이저에 도전하게 되는데,
후일 당시 팀동료였던 가네무라 요시아키(金村義明)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노모의 심경을 적고 있는데,
노모는 "저는 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감독 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것 뿐입니다." 라고 밝혔습니다.
노모의 진출이 단순한 도전정신으로 보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노모는 양키스, 메츠, 샌프란시스코, 애틀랜타 등을 방문하며,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당시 메이저리그에 있는 동양인은 1994년 다저스에 입단하여, 2경기에서 4이닝을 던진 더블A 투수 박찬호가 전부.
동양인에 대한 신뢰가 가지 않았던 것이 첫번째 이유.
게다가 노모는 일본 프로시절,
134경기에 선발로 등판하여 80번 완투, 140구 이상 투구한 경기가 61경기, 최다투구 198구 16볼넷의 기록.
이런 말도 안되는 완투와 이상하리만큼 많은 투구수가 두번째 이유였던 것입니다.
결국 노모는 입단 보너스 200만달러와 최저 연봉 10만9000달러를 제안한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10만9000달러를 당시의 엔화로 환산하면 980만엔으로,
노모의 1994년 연봉(1억4000만엔)에 14분의1에 불과한 금액.
일본 최고의 최정상급 투수였던 노모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신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게 됩니다.

메이저리고 입성 첫 시즌이 된 95년.
95년 메이저리그에는, 또 다시 토네이도 열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데뷔 4번째 경기만에 17K를 잡아냈던 것처럼,
노모는 미국에서도 4번째 경기만에 14K를 잡아냈고,
그리고 3경기 뒤에, 16K를 잡아내며 다저스 신인 최다탈삼진 신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이렇게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노모에게 엄청난 탈삼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노모만이 던질 수 있는 비기와도 같은 구질, 포크볼에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던지는 스플리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엄청난 낙차를 보여주는 노모의 포크볼에,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우수수 떨어져나갔고,
그 결과, 데뷔 첫해, 방어율 2위, 탈삼진 1위에 오르게 됩니다. (물론, 최다 볼넷 2위도 함께 차지)
그리고, 9이닝당 11.1K라는 엄청난 탈삼진율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 기록은 샌디쿠팩스가 1962년에 기록한 9이닝당 10.6K의 기록을, 34년만에 경신한 것이기도 합니다.
** 메이저리그에서 포크볼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20년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포크볼이라는 구종 자체가, 몸에 무리가 가기 쉬운 공인데다가,
부상의 위험이 엄청나기 때문에, 포크볼 대신 스플리터를 던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플리터가 포크볼보다 부상위험도 적고, 실제로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하죠)
그렇기 때문에, 메이저리그에는 포크볼이라는 말이 거의 사라지고, 스플리터라는 말만 남았다고 합니다.
-> 그래서 미국에서 일본 선수들이 던지는 포크볼을,
포크볼이라고 안하고 스플리터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미 잘 쓰이지 않는 단어라서)
데뷔 첫 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서 신인으로 선발투수에 등판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됩니다.
당시 상대 선발투수는 랜디 존슨. 노모는 2이닝을 던지며, 3명을 탈삼진으로 돌려세웠습니다.
그리고 신인상 투표에서 28명의 기자단 중, 18명의 선택을 받아 신인왕에 선출 (10명은 치퍼존스를 선택)
당시 일본에서는, 박찬호가 한참 활약했을 당시, (박찬호의 선발등판일 아침)과 같은 현상이,
일본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상상이 되시죠, 오늘 박찬호가 어땠냐느니, 기가막혔다느니)
일본 뿐 아니라, LA에서도 똑같이 등판일마다 토네이도 열풍이 불었습니다.
노모는 메이저리그 진출 첫해,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95년 11월에 열린 미일정상회담에 초대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2년차였던 96년 9월 18일, 콜로라도 원정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게 되는데,
쿠어스필드에서의 노히트노런은 노모가 처음이자 마지막.
(얼마전 커쇼가 완봉승을 달성했고, 김선우 선수도 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했었죠)

드와이트 구든 이후, 노모는 데뷔와 함께 3년 연속 200K를 달성했지만,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점점 노모의 투구폼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고,
시즌이 종료됨과 함께 노모는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됩니다.
포크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패스트볼.
이 수술로 노모는 패스트볼의 구속을 잃게 됩니다. 즉, 포크볼의 위력도 같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죠.
이때부터 노모의 저니맨 생활이 시작됩니다.
98년 노모는 12경기에서 2승7패 방어율 5.05의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메츠에 트레이드 됩니다.
메츠에서도 달라진 것이 없이, 16경기 선발등판, 4승 5패 방어율 4.82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99년 노모는 시카고 컵스에 입단했고, 구단은 그에게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기량이 좋아져도 계속해서 마이너리그 등판을 지시하자, 스스로 구단에서 나와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잡은 곳은 밀워키 브루어스.
당시 밀워키 감독이었던 필 가너 감독은 노모에 굉장한 기대를 걸었습니다.

밀워키에서 보낸 시즌에 노모는 12승 8패, 방어율4.54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시즌 후 밀워키는 노모를 웨이버 공시했고 필라델피아가 이에 클레임을 걸어 노모를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계약에 실패했고, 이에 따라 노모는 FA로 풀리게 됩니다.
00년 노모는 필 가너 감독이 있는 디트로이트로 이적했고, 8승 12패 방어율 4.74를 기록합니다.
조금 다르게 본다면, 노모의 야구인생은 이쯤에서 마무리가 된다고 봐도,
어느 누구하나 반박할 수 없었을텐데, 노모는 이렇게 저니맨이 되어 팀을 갈아타는 사이,
스스로 포크볼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슬라이더와 커브를 연마해서 변신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변신을 시도한 1년 사이, 완전히 가다듬게 되죠.
00 시즌이 끝난 이후, FA로 풀린 노모에, 의외로 많은 구단이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노모는 단순히,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투구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이유로,
보스턴 레드삭스를 선택하여, 보스턴으로 이적을 하게 됩니다.

01년 시즌이 시작되고, 4월 5일, 노모는 보스턴 데뷔전에서,
볼티모어를 상대로 생애 2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습니다.
팀의 데뷔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거둔 투수가 나온 것은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
그리고 이 노히터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날짜에 나온 노히트노런으로 기록.
보스턴 투수의 노히트노런은 1965년 데이브 모어헤드 이후 처음이며,
또한 1992년에 개장한 볼티모어의 홈구장 캠든야즈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트노런으로 기록됩니다.
노모는 이 노히트노런으로, 사이 영, 짐 버닝, 놀란 라이언에 이어,
양 리그에서 모두 노히터를 만들어낸 역대 4번째 선수가 됩니다. (이후 랜디 존슨이 역대 5번째로 등록).
마르티네즈가 부상으로 고통받던 그 해에,
노모는 팀내 최다승인 13승을 거두었고, 220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탈삼진 타이틀을 얻어냈는데,
이 탈삼진 타이틀로, 노모는 양대 리그에서 모두 탈삼진 타이틀을 따낸 선수가 되었습니다.

01 시즌이 끝난 이후, 다시 FA 자격을 얻은 노모는, 친정팀은 다저스로 복귀.
다저스는 그런 노모에게 개막전 선발의 중책을 맡깁니다만, 결과는 3이닝 4실점의 패전.
다음해였던 03년에도 개막전 선발을 맡겼는데, 랜디존슨과의 맞대결에서 완봉승을 거두게 됩니다.
노모는 다저스에서 2년 연속 16승을 올리게 되는데,
03년 시즌이 끝난 후, 어깨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 수술로 사실상 노모의 커리어는 끝이 나게 됩니다.
수술을 받은 이후, 18경기에 등판하여 4승11패 방어율 8.25 /
다저스 투수 역사상, 15경기 이상 등판한 투수 가운데, 최악의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로 남게 되었습니다.

05년 템파베이와 80만달러에 계약에 성공한 노모는 그해 6월 17일 미일 통산 200승 달성에 성공.
템파베이는 계약조건에 20경기 이상 선발로 나서면, 70만달러의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는데,
템파베이는 20번째 등판 이틀전에 노모를 방출시킵니다.
5승 8패 방어율 7.24의 기록을 낸 노모에게,
가난한 편에 속하는 구단인 템파베이가, 인센티브를 줄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또 다시 노모는 뉴욕 양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지만,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지 못합니다.
06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지만, 역시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지 못하고, 방출됩니다.
그리고 06 시즌이 끝난 이후, 다시한번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됩니다.
이 수술 이후, 노모는 팔꿈치에 지나친 무리가 가는,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토네이도 투구폼을 버리고,
투구폼을 수정하게 위해서, 07년 베네수엘라 리그 팀과 계약을 하고, 메이저리그 재입성의 희망을 키웁니다.

이후, 0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노모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찾아왔고, 노모는 메이저리그 재입성에 성공합니다.
05년 이후, 3년만에 메이저리그 재입성.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4월 10일 메이저리그 복귀전에서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호르헤 포사다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
이후 3경기에서 4⅓이닝 9실점. 이 기록을 끝으로, 더이상의 등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노모를 4월 29일 방출합니다.
그리고 7월18일, 메이저리그 123승, 미일 통산 201승으로 노모는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극단적인 투구폼을 지녔던 투수.
포크볼이라는 구종 하나만으로, 일본과 미국을 휩쓸었던 토네이도.
노모가 현실과 타협하여, 좀더 위험부담이 덜한 투구폼과, 위험부담이 덜한 구종을 선택했더라면,
좀 더 롱런할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하지만 노모는, 포크볼의 위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했고,
패스트볼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토네이도 투구폼을 스스로 연마.
그리고 그렇게 극단적인 공을 던지기 위해서, 극단적인 오버스로 투구폼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의 5년간 엄청난 혹사도, 그의 짧은 선수생활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무엇보다, 시작부터가, 태생부터가 그렇게 던졌던 노모에게, 긴 선수생활을 바랬다는 것은,
어찌보면 어불성설이었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투혼이라는 말.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선수.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오직 오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이것이 우리 가슴속에 남아있는, 노모 히데오가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 90-00년대 등장했던 노모와 박찬호를 비교하는 무수한 기사들.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너무 어이없는 기사들이 많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어제 봤던 질문게시판의 글에 조금 제 의견을 적어본다면,
박찬호, 김병현, 다르빗슈, 마쓰자카, 왕첸밍, 구로다, 류현진 등,
어떤 동양인 투수를 비교한다고 한들, 노모의 커리어나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제 오전에 질문게시판에
박찬호 / 노모 / 다르빗슈 유 관련 질문글을 보고서,
이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작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대표적인 일본인 메이저리거 하면, 다르빗슈, 구로다가 생각나겠지만,
아직까지 저에게는 노모가 가장 인상깊습니다.

유년시절 일찌감치 야구를 시작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지만, 노모 히데오는 철저하게 무명이었습니다.
(이미 토네이도 투구폼은, 유년시절 완성된 폼으로, 직구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저렇게 던졌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역시, 약체 지역의 약체 고등학교, 세이조 공고에 진학.
2학년 시절 오사카 부 지역예선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기록도 있고,
3학년 때에는 학교를 지역 예선 16강에 진출시키기도 했지만, 고시엔 본선에는 올라가보지 못합니다.
이런 커리어로는 프로에 입단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프로에 지명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노모는 사회인야구 팀인 신일본제철에 입단하게 됩니다.
단, 자신의 투구폼에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는 조건과 함께 계약을 하게 됩니다.
(일본의 사회인야구팀은, 한국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도하 아시안게임의 참사 )

입단 첫 해에, 노모는, 자신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불리우는 포크볼을 배우게 됩니다.
감독은 대수롭지 않게 포크볼 그립을 가르쳐줬는데,
배운 이 시점부터, 노모는 이 포크볼을 파고, 또 파고, 연구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노모의 포크볼은 사회인 레벨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레벨이 되버립니다.
이후, 88년 서울 올림픽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거는 성과를 거두고,
자신의 이름을 일본 전역에 널리 알리게 됩니다.
(이때 같이 호흡을 맞춘 포수는, 컴퓨터 포수, 후루타 야쓰야 입니다.)

1989년에 진행된 드래프트에서, 일본 프로야구의 12팀 중 무려 8팀이 노모를 1순위로 지명하게 됩니다.
8구단의 지명을 받은 선수는 노모 히데오가 유일하며, 아직까지도 일본드래프트 사상 최고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노모를 지명하지 않은 팀은, 세이부, 주니치, 히로시마, 요미우리)
추첨을 통해서, 긴테쓰 버팔로우스가 우선 교섭권을 얻었고,
노모 쟁탈전에서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
노모 쟁탈전에서 패배한 요코하마는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컴퓨터 포수' 후루타 야쓰야를 지명하게 됩니다.
노모는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1억엔대 계약금(1억2000만엔)을 받고 긴테쓰에 입단하게 됩니다.
단, 자신의 투구폼에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는 조건과 함께 계약을 하게 됩니다.

1990년 일본리그에는 토네이도 열풍이 불게 됩니다.
데뷔 4번째 경기에서 프로 첫 승과 함께, 17개의 탈삼진으로, 일본야구 타이기록을 경신.
데뷔 첫해 28경기 선발로 등판하여, 21 완투.
완투에 실패한 7경기 중 1경기는 10회 2사에서 교체된 것으로, 노모는 경기당 8.38이닝을 던졌습니다.
데뷔 첫해 노모는
다승 (18승8패) 평균자책점(2.91) 탈삼진(235이닝 287삼진) 승률 / 4관왕이 되었고,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인왕 - 사와무라상 - MVP 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듬해에도, 노모는 29경기 선발로 등판하여, 22번 완투.
다시 다승과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31경기 17승11패 1세이브 3.05, 242이닝 287삼진).
1993년까지 4년 연속으로 다승과 탈삼진을 4연패했는데,
데뷔 첫 해부터 4년 연속 다승왕에 오른 투수는 NPB 역사상, 노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와 더불어, 4년 연속 최다 사사구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정말 많은 탈삼진을 잡는 능력 만큼이나, 볼넷도 많이 준 투수입니다.
(그 이유는, 결정구인 포크볼을 골라내면 볼넷이기 때문에.....)
일본프로야구 5년간,
139경기(134선발) 78승 46패 1세이브 80완투 13완봉 완투율 약 59.7%,
1051⅓이닝 / 1204탈삼진 / 588볼넷 / 방어율 3.15 의 말도 안되는 기록을 내게 됩니다.

90년 처음으로 출전한 미일올스타전에서, 내셔널리그 올스타 배리본즈를 상대로,
볼넷을 내주고, 만루상황에서 적시타를 맞는 등 완패하며, 메이저리그를 꿈꾸게 됩니다.
(이후 노모는,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2번 등판. 8타수 무안타 4삼진. 완벽하게 복수를 해냅니다.)
그리고 93년 출전한 미일올스타전에서 만나게 된 로저 클레멘스.
이미 3개의 사이영상을 수상했던 클레멘스가 노모에게 해준 '미국으로 와라'는 말.
이 말로부터, 노모는 메이저리그를 마음에 품게 됩니다.
데뷔 이후 4년동안 너무 많은 공을 던진 노모는,
94년 마침내 어깨에 무리가 오게 됩니다. (포크볼러의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이와 더불어 93년에 부임한 스즈키 게이시 감독은,
입단 당시 계약 조건을 깨고, 노모의 투구폼에 간섭을 하기 시작합니다.
현역 300승을 달성한 스즈키 감독은 노모가 8월에 부상을 당하자 "이제 그는 끝났다"고 발언합니다.
시즌이 막바지였던 10월1일 경기에서, 노모는 4회 머리에 타구를 맞고 교체. 두개골에 실금이 갔다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노모는 9일 경기에 자원으로 등판하여, 7⅓이닝 동안 144개의 공을 뿌렸고,
13일 경기에서도 10이닝 완투를 하면서 182개의 공을 투구. 17일에도 연장 10회까지 177개의 공을 뿌렸습니다.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9일 동안 3경기에 나서 503개의 공을 투구.
이는 스즈키 감독을 향한 메시지이자, 일본에서 보여준 마지막 투혼이자 작별인사로 남게 됩니다.
이후, 노모는 구단에 다년계약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은퇴한 선수는 어떤 팀에서도 뛸 수 있다'는 조항을 이용해 FA 자격을 얻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됩니다.
-> 이후 NPB측은 이 조항을 고쳤습니다.
* 이렇게 여러가지 감독과 얽힌 이 관계에 있어서, 메이저에 도전하게 되는데,
후일 당시 팀동료였던 가네무라 요시아키(金村義明)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노모의 심경을 적고 있는데,
노모는 "저는 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감독 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것 뿐입니다." 라고 밝혔습니다.
노모의 진출이 단순한 도전정신으로 보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노모는 양키스, 메츠, 샌프란시스코, 애틀랜타 등을 방문하며,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당시 메이저리그에 있는 동양인은 1994년 다저스에 입단하여, 2경기에서 4이닝을 던진 더블A 투수 박찬호가 전부.
동양인에 대한 신뢰가 가지 않았던 것이 첫번째 이유.
게다가 노모는 일본 프로시절,
134경기에 선발로 등판하여 80번 완투, 140구 이상 투구한 경기가 61경기, 최다투구 198구 16볼넷의 기록.
이런 말도 안되는 완투와 이상하리만큼 많은 투구수가 두번째 이유였던 것입니다.
결국 노모는 입단 보너스 200만달러와 최저 연봉 10만9000달러를 제안한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10만9000달러를 당시의 엔화로 환산하면 980만엔으로,
노모의 1994년 연봉(1억4000만엔)에 14분의1에 불과한 금액.
일본 최고의 최정상급 투수였던 노모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신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게 됩니다.

메이저리고 입성 첫 시즌이 된 95년.
95년 메이저리그에는, 또 다시 토네이도 열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데뷔 4번째 경기만에 17K를 잡아냈던 것처럼,
노모는 미국에서도 4번째 경기만에 14K를 잡아냈고,
그리고 3경기 뒤에, 16K를 잡아내며 다저스 신인 최다탈삼진 신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이렇게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노모에게 엄청난 탈삼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노모만이 던질 수 있는 비기와도 같은 구질, 포크볼에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던지는 스플리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엄청난 낙차를 보여주는 노모의 포크볼에,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우수수 떨어져나갔고,
그 결과, 데뷔 첫해, 방어율 2위, 탈삼진 1위에 오르게 됩니다. (물론, 최다 볼넷 2위도 함께 차지)
그리고, 9이닝당 11.1K라는 엄청난 탈삼진율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 기록은 샌디쿠팩스가 1962년에 기록한 9이닝당 10.6K의 기록을, 34년만에 경신한 것이기도 합니다.
** 메이저리그에서 포크볼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20년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포크볼이라는 구종 자체가, 몸에 무리가 가기 쉬운 공인데다가,
부상의 위험이 엄청나기 때문에, 포크볼 대신 스플리터를 던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플리터가 포크볼보다 부상위험도 적고, 실제로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하죠)
그렇기 때문에, 메이저리그에는 포크볼이라는 말이 거의 사라지고, 스플리터라는 말만 남았다고 합니다.
-> 그래서 미국에서 일본 선수들이 던지는 포크볼을,
포크볼이라고 안하고 스플리터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미 잘 쓰이지 않는 단어라서)
데뷔 첫 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서 신인으로 선발투수에 등판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됩니다.
당시 상대 선발투수는 랜디 존슨. 노모는 2이닝을 던지며, 3명을 탈삼진으로 돌려세웠습니다.
그리고 신인상 투표에서 28명의 기자단 중, 18명의 선택을 받아 신인왕에 선출 (10명은 치퍼존스를 선택)
당시 일본에서는, 박찬호가 한참 활약했을 당시, (박찬호의 선발등판일 아침)과 같은 현상이,
일본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상상이 되시죠, 오늘 박찬호가 어땠냐느니, 기가막혔다느니)
일본 뿐 아니라, LA에서도 똑같이 등판일마다 토네이도 열풍이 불었습니다.
노모는 메이저리그 진출 첫해,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95년 11월에 열린 미일정상회담에 초대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2년차였던 96년 9월 18일, 콜로라도 원정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게 되는데,
쿠어스필드에서의 노히트노런은 노모가 처음이자 마지막.
(얼마전 커쇼가 완봉승을 달성했고, 김선우 선수도 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했었죠)

드와이트 구든 이후, 노모는 데뷔와 함께 3년 연속 200K를 달성했지만,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점점 노모의 투구폼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고,
시즌이 종료됨과 함께 노모는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됩니다.
포크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패스트볼.
이 수술로 노모는 패스트볼의 구속을 잃게 됩니다. 즉, 포크볼의 위력도 같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죠.
이때부터 노모의 저니맨 생활이 시작됩니다.
98년 노모는 12경기에서 2승7패 방어율 5.05의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메츠에 트레이드 됩니다.
메츠에서도 달라진 것이 없이, 16경기 선발등판, 4승 5패 방어율 4.82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99년 노모는 시카고 컵스에 입단했고, 구단은 그에게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기량이 좋아져도 계속해서 마이너리그 등판을 지시하자, 스스로 구단에서 나와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잡은 곳은 밀워키 브루어스.
당시 밀워키 감독이었던 필 가너 감독은 노모에 굉장한 기대를 걸었습니다.

밀워키에서 보낸 시즌에 노모는 12승 8패, 방어율4.54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시즌 후 밀워키는 노모를 웨이버 공시했고 필라델피아가 이에 클레임을 걸어 노모를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계약에 실패했고, 이에 따라 노모는 FA로 풀리게 됩니다.
00년 노모는 필 가너 감독이 있는 디트로이트로 이적했고, 8승 12패 방어율 4.74를 기록합니다.
조금 다르게 본다면, 노모의 야구인생은 이쯤에서 마무리가 된다고 봐도,
어느 누구하나 반박할 수 없었을텐데, 노모는 이렇게 저니맨이 되어 팀을 갈아타는 사이,
스스로 포크볼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슬라이더와 커브를 연마해서 변신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변신을 시도한 1년 사이, 완전히 가다듬게 되죠.
00 시즌이 끝난 이후, FA로 풀린 노모에, 의외로 많은 구단이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노모는 단순히,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투구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이유로,
보스턴 레드삭스를 선택하여, 보스턴으로 이적을 하게 됩니다.

01년 시즌이 시작되고, 4월 5일, 노모는 보스턴 데뷔전에서,
볼티모어를 상대로 생애 2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습니다.
팀의 데뷔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거둔 투수가 나온 것은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
그리고 이 노히터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날짜에 나온 노히트노런으로 기록.
보스턴 투수의 노히트노런은 1965년 데이브 모어헤드 이후 처음이며,
또한 1992년에 개장한 볼티모어의 홈구장 캠든야즈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트노런으로 기록됩니다.
노모는 이 노히트노런으로, 사이 영, 짐 버닝, 놀란 라이언에 이어,
양 리그에서 모두 노히터를 만들어낸 역대 4번째 선수가 됩니다. (이후 랜디 존슨이 역대 5번째로 등록).
마르티네즈가 부상으로 고통받던 그 해에,
노모는 팀내 최다승인 13승을 거두었고, 220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탈삼진 타이틀을 얻어냈는데,
이 탈삼진 타이틀로, 노모는 양대 리그에서 모두 탈삼진 타이틀을 따낸 선수가 되었습니다.

01 시즌이 끝난 이후, 다시 FA 자격을 얻은 노모는, 친정팀은 다저스로 복귀.
다저스는 그런 노모에게 개막전 선발의 중책을 맡깁니다만, 결과는 3이닝 4실점의 패전.
다음해였던 03년에도 개막전 선발을 맡겼는데, 랜디존슨과의 맞대결에서 완봉승을 거두게 됩니다.
노모는 다저스에서 2년 연속 16승을 올리게 되는데,
03년 시즌이 끝난 후, 어깨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 수술로 사실상 노모의 커리어는 끝이 나게 됩니다.
수술을 받은 이후, 18경기에 등판하여 4승11패 방어율 8.25 /
다저스 투수 역사상, 15경기 이상 등판한 투수 가운데, 최악의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로 남게 되었습니다.

05년 템파베이와 80만달러에 계약에 성공한 노모는 그해 6월 17일 미일 통산 200승 달성에 성공.
템파베이는 계약조건에 20경기 이상 선발로 나서면, 70만달러의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는데,
템파베이는 20번째 등판 이틀전에 노모를 방출시킵니다.
5승 8패 방어율 7.24의 기록을 낸 노모에게,
가난한 편에 속하는 구단인 템파베이가, 인센티브를 줄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또 다시 노모는 뉴욕 양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지만,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지 못합니다.
06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지만, 역시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지 못하고, 방출됩니다.
그리고 06 시즌이 끝난 이후, 다시한번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됩니다.
이 수술 이후, 노모는 팔꿈치에 지나친 무리가 가는,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토네이도 투구폼을 버리고,
투구폼을 수정하게 위해서, 07년 베네수엘라 리그 팀과 계약을 하고, 메이저리그 재입성의 희망을 키웁니다.

이후, 0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노모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찾아왔고, 노모는 메이저리그 재입성에 성공합니다.
05년 이후, 3년만에 메이저리그 재입성.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4월 10일 메이저리그 복귀전에서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호르헤 포사다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
이후 3경기에서 4⅓이닝 9실점. 이 기록을 끝으로, 더이상의 등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노모를 4월 29일 방출합니다.
그리고 7월18일, 메이저리그 123승, 미일 통산 201승으로 노모는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극단적인 투구폼을 지녔던 투수.
포크볼이라는 구종 하나만으로, 일본과 미국을 휩쓸었던 토네이도.
노모가 현실과 타협하여, 좀더 위험부담이 덜한 투구폼과, 위험부담이 덜한 구종을 선택했더라면,
좀 더 롱런할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하지만 노모는, 포크볼의 위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했고,
패스트볼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토네이도 투구폼을 스스로 연마.
그리고 그렇게 극단적인 공을 던지기 위해서, 극단적인 오버스로 투구폼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의 5년간 엄청난 혹사도, 그의 짧은 선수생활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무엇보다, 시작부터가, 태생부터가 그렇게 던졌던 노모에게, 긴 선수생활을 바랬다는 것은,
어찌보면 어불성설이었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투혼이라는 말.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선수.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오직 오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이것이 우리 가슴속에 남아있는, 노모 히데오가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 90-00년대 등장했던 노모와 박찬호를 비교하는 무수한 기사들.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너무 어이없는 기사들이 많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어제 봤던 질문게시판의 글에 조금 제 의견을 적어본다면,
박찬호, 김병현, 다르빗슈, 마쓰자카, 왕첸밍, 구로다, 류현진 등,
어떤 동양인 투수를 비교한다고 한들, 노모의 커리어나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출처 : pgr21
글쓴이 닉네임 : 민머리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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