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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19:10

[Fever Pitch 03] 이동국

조회 수 1734 추천 수 11 댓글 8






(이미지출처 : 전북현대모터스 공식 홈페이지)



이름: 이동국

 생년월일: 1979-04-29

 소속: 포항스틸러스 - W.브레멘 - 포항스틸러스 - 광주상무 - 포항스틸러스 

미들스브로 - 성남일화 - 전북현대

 포지션: 스트라이커

 키: 187cm

 A매치 기록: 84경기 25골

 프로팀 기록: 296경기 106골(2010년 12월 10일 기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4강 신화를 써내려간 이후, 한국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10여 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한 선수에 대한 끊이지 않는 논쟁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 논쟁은 그 선수가 은퇴한 다음까지도 계속될, 끝나지 않을 논쟁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축구팬들의 논쟁을 불러온 이 선수는 바로 ‘라이언 킹’, 이동국입니다.

 이동국에 대한 팬들의 평가는 가지각색이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흔히들 비하하는 말로 부르는, ‘동까’ 와 ‘동빠’입니다. 짐작하겠지만 전자는 이동국을 비판하는 쪽이고 후자는 이동국을 옹호하는 입장이죠. 이동국을 비판하는 쪽은 움직임이 정적이고 활동량이 적다, 아시아 무대에서는 확실한 카드일지는 몰라도 더 큰 국제무대에서는 통하는 않는다는 평(이른바 아시아用)부터 거스 히딩크 감독이 그를 C급 공격수로 평가했다는 말까지 인용하며 이동국을 비판합니다. 반면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그가 예전과는 달리 움직임이 많고 동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한 방’을 갖고 있는 선수다, 라는 말로 그를 변호하죠.(흔히들 말하는 ‘쉴드’를 쳐 줍니다.) 물론 어떤 선수에 관해서 축구팬들 사이에서 논쟁이 펼쳐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단순히 박지성이 한 경기만 뛰어도 그것을 가지고 여러 논쟁이 펼쳐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몇 년간 지속적으로 한 선수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는 것은 뭔가 특기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논쟁, 즉 ‘동까’들과 ‘동빠’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개인적으로는 이동국이라는 그 선수를 좋아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플레이스타일과 같은 필드 안의 모습보다는 필드 밖에서 보여준 모습과 이야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것이죠. 저는 단언컨대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자서전을 낸다면 그 중에 이동국의 자서전이 가장 두꺼우면서도 감동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국만큼 우리나라 선수들 중에서 선수생활을 많이 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은 선수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리고 K리그에서 전북의 경기가 있는 날이 되면 저는 이동국이 골을 터뜨려줄 것을 기대하며(물론 수원을 상대로는 침묵해주길 바라며) 그의 극적인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길 희망합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1무 2패라는 성적을 거두면서 목표였던 16강 진출에 실패합니다. 최용수의 활약과 차범근 감독의 용병술로 경우의 수를 따지지 않는 압도적인 조 예선 1위로 진출하여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사람들과 언론들의 실망도 더 컸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16강 진출 실패가 아니라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차범근 감독의 경질이었죠. 대한축구협회는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5-0의 충격적인 대패를 당하자 대회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차범근 감독을 경질하고 맙니다. 대표팀의 주축 수비수였던 홍명보도 자서전 <<영원한 리베로>>에서 선수단조차 예상치 못했던 경질이여서 충격적이었다고 말했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언론들은 한국축구의 희망을 보았다며 두 명의 선수를 주목했습니다. 그 두 선수가 바로 이동국과 고종수였죠. 특히 이동국은 네덜란드 전에서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에드가 다비즈를 제치고 위협적인 중거리 슛 - 그 경기에서 한국이 보여주었던 유일하게 위협적인 장면이었습니다 - 으로 커다란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이동국의 네덜란드 전 경기모습.
이동국은 당대 최고의 수비형미드필더라 불리는 에드가 다비즈를 제치고
날카로운 중거리슛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미지 출처 : blog.daum.net/bhjun)
  

 이동국은 98년 프로에 데뷔하면서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선수였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을 거치지 않고 프로무대에 바로 뛰어들었기 때문이죠. 지금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직행하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학에 가지 않고 곧장 프로로 직행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데, 당시 이동국은 고교를 갓 졸업한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플레이를 펼쳤죠. 이러한 플레이를 바탕으로 이동국은 98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고, 대회가 끝나자 한국축구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98년부터 이동국은 3개의 각급 대표팀 - 청소년 대표팀, 아시안 게임 대표팀, 그리고 성인 대표팀 - 에 모두 이름을 올리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비록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좋지 않은 경기력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바로 같은 해,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김은중과 호흡을 맞춰 득점왕과 MVP를 차지, 자신에 대한 비난을 불식시켰습니다. 특히 이 대회 결승전이었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180° 터닝슛은 많은 올드팬들에게 회자되는 슛이죠. 이 슛을 본 당시 일본대표팀의 감독이던 필립 트루시에는 주목받는 신인 스트라이커인 다카하라 나오히로와 미드필더 오노 신지를 주고서라도 일본에 데려오고 싶다며 이동국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98년,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무대에 데뷔한 이동국의 모습입니다. 
 
이동국은 이해 안정환, 고종수를 제치고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쥡니다.
(이미지 출처 : K리그 공식 홈페이지)
 

 프로무대에서도 그의 활약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인이었던 1998 시즌에 그는 리그 15경기에서 7골, 리그 컵에서는 9경기 4골을 기록하면서 포항의 아시안 클럽챔피언십(지금의 AFC챔피언스리그의 전신) 2연패를 이끈 동시에 수원의 고종수와 부산의 안정환을 제치고 그 해 프로축구 신인왕을 수상합니다. 98년 신인왕 경쟁을 펼쳤던 이 세 명의 선수는 이 당시 ‘트로이카’로 불리면서 ‘K리그 르네상스’를 주도하죠. 다음해인 1999년, 이동국은 화려한 외모와 뛰어난 실력으로 K리그의 흥행과 포항 스틸러스의 공격을 동시에 이끌었습니다. 이동국은 99년에 ‘2년차 징크스’라는 말을 비웃듯, 리그 15경기 7골, 리그 컵 4경기 1골로 포항 공격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비록 같은 해 기대를 모았던 나이지리아 세계 청소년 선수권대회에서 조별예선 탈락 - 일본은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습니다 - 하면서 또다시 비판에 휩싸였지만, 역시 같은 해 있었던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에서는 무려 8골을 터뜨리면서 시드니 올림픽 본선행을 이끌었습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대표팀, 그리고 아시안컵에 출전한 이동국의 모습.
마지막 장현의 무릎 테이핑에서 보듯, 이동국은 이미 혹사로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상단 이미지 출처 : K리그 공식 네이버블로그
하단 이미지 출처 : 대한민국 축구협회 공식 홈페이지) 


 2000년, 이동국은 소속팀 포항의 경기는 물론 시드니 올림픽과 아시안 컵에 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동국의 몸 상태는 이미 혹사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죠. 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 같은 해 방콕 아시안게임과 아시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 그리고 다음해 있었던 올림픽 예선과 세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 그리고 포항에서 치른 50여 경기, 그리고 각종 A매치와 골드컵과 같은 국제대회까지, 만 21살의 선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경기 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해임의 압박을 받던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을 대표팀으로 호출하죠. 이동국은 시드니 올림픽 칠레전 결승골과 아시안컵에서도 결정적인 득점들 - 8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큰 승리가 필요했던 인도네시아 전에서의 해트트릭, 이란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골, 중국과의 3-4위전에서의 결승골까지 - 을 뽑아내고 득점왕으로 등극하면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냅니다. 하지만 아시안 컵에서 보여준 이동국의 다리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허벅지는 온통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고, 그건 이동국의 혹사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였죠.
 

 2001년 1월, 대한축구협회는 계획적으로 축구 유망주들을 해외로 보내 선진축구기술을 습득시키고 월드컵에 대비하기 위해서 몇 명의 유망주를 소속 팀의 의사를 무시하고, 해외 팀으로 진출시킵니다. 이 때 해외에 진출했던 선수가 이동국을 비롯해서 설기현, 심재원 등의 선수였는데, 결과적으로 성공한 선수는 설기현 밖에 없었죠. 이동국은 K리그의 포항에서도 뛰었던 라데가 소속된 베르더 브레멘에 임대 형식으로 입단해서 6개월 간 뛰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혹사당한 몸으로 아일톤과 피사로라는 걸출한 공격수들을 밀어내고 출장기회를 잡기엔 너무나 힘들었고 고작 7경기를 치른 채 포항으로 복귀하게 되죠. 어느덧 한·일 월드컵이 1년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습니다.



브레멘에서 경기를 치르는 이동국의 모습. 
베르더 브레멘의 공격진은 당시 부상으로 첨철되어있던 이동국의 몸으로는 밀어내기 힘든 상황이었고, 
결국 이동국은 7경기만을 뛴 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farm4.staticflickr.com)

 

 2002년 4월 30일, 2002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가 발표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이동국의 이름은 없었죠. 많은 국민들이 4강 신화와 축제에 열광하고 있었을 때, 이동국만은 그 속에 끼지 못하고 충격에 빠져 있었습니다. 후에 이동국은 인터뷰에서 이때의 심정을 고백했습니다.

 “한국 경기들은 다 봤고 특히 스페인 전이 기억에 남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보기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TV앞에 가지도 않고 친구들을 만나서 놀며 여행을 다니고 그랬다. 그 기간에는 거의 축구를 잊고 지냈던 것 같다. … 내가 있어야 할 곳인데 라는 생각도 해 봤고 그 당시엔 화도 많이 났다. 지금 와 보니 그 때 그 심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 오히려 그런 시련이 약이 돼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는 본보기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히딩크는 왜 이동국을 엔트리에서 제외했던 것일까요? 히딩크의 자서전 <<My Way>>를 보면 히딩크가 이동국을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한 두 가지의 이유가 언급되어있습니다. 첫 번째는 최종엔트리 발표 직후 부분입니다.
 

 … 이동국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는 부상에 시달리며 자기 계발 기회를 놓쳤다. 체력에서 더 나아져야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스트라이커로서의 감각도 있었지만 종합평점에 비교에서 다른 선수들을 앞서지 못했다. … (<<My Way>> 中 )


두 번째는 선수 개개인에 대한 평가 부분에서 나옵니다.
 

 … 이동국 선수는 좋은 선수이다. 신체적인 조건이 좋으며 정확한 위치선정과 골결정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최종엔트리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것은 스트라이커로서의 움직임이다. 즉, 우리가 월드컵에서 만날 상대는 우리보다 한 수 내지 두 수 위의 팀들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많이 뛰어야 하며, 조직적으로 그들을 압박해야만 상대할 수 있다. 그럼 점에서 이동국 선수는 훌륭하지만 월드컵에서 우리 팀이 소화해야할 경기에 투입할 수가 없다. 다른 장점들이 훌륭하지만 우리 팀의 스트라이커에게 필요한 움직임을 통한 공간 활용, 수비시에 가담 능력, 고립되었을 때의 개인의 해결능력 등...이런 이유에서 그를 제외시켰다. … (<<My Way>> 中 )


 월드컵 이후 당시 포항의 감독이었던 최순호 감독은 히딩크 감독에게 이동국을 완전히 회복시켜 몸을 제대로 만들고 대표팀에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습니다. 히딩크와 대표팀에게 중요한 것은 불과 1년 여 밖에 남지 않은 월드컵이었고 이동국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줄 시간은 없었을 테니까요. 만약 최순호 감독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동국이 완전 회복되어 대표팀 경쟁에 임했더라도 이동국이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것도 이미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한 무의미한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동국이 혹사로 인한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대표팀 경쟁에서 밀렸다는 것이죠. 히딩크도 자서전에서 언급했듯, 이동국은 너무 많은 부상과 혹사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온전한 기량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어찌됐든, 결국 이동국은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채 온 국민의 축제를 쓸쓸히 지켜보아야만 했고, 이때부터 ‘게으른 천재’라는 타이틀이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그 해 9월 말-10월 한국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이동국에게 명예회복의 기회이자 병역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2002 월드컵에서 수석코치를 역임했던 박항서 감독의 지휘아래, 이동국은 대표팀의 주장으로 몰디브, 말레이시아, 오만과의 조별예선과 바레인과의 8강전까지 모두 골을 터뜨리며 금메달을 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4강전은 이란과의 경기. 무득점 끝에 승부차기까지 간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이영표의 실축으로 탈락하고 맙니다. 결국 이동국은 2003년 광주상무로 입대하게 되죠.(‘개동국 당신의 입대를 축하합니다.’라는 배너가 걸린 것도 이즈음 이었습니다.)

 


이동국이 주장으로 나섰던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이란과 4강에서 만난 대표팀은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고, 결국 이동국은 입대를 하게 됩니다.
  
(상단 이미지 출처 : blog.incheon2004.kr)
 

이 유명한 배너.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 배너 
를 달았을까요?
(하단 이미지 출처 : 다음카페 아이러브싸커)  


 광주상무에 입대하면서 이동국의 플레이스타일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전방에서 천천히 골을 노리던 예전 움직임과는 달리 경기장 이곳저곳으로 활동량을 넓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소속 팀이 만년 하위권이었던 광주였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언론과 팬들에게 계속 들었던 ‘게으른 천재’라는 말이 이동국의 플레이스타일을 바꿨을 것입니다. 이렇듯 이동국의 바뀐 스타일에 대해 포항의 최순호 감독은 불만을 표시 - 이로 인해 공격수가 가져야 할 날카로운 골 감각이 무뎌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 하기도 했지만, 이동국의 이런 달라진 스타일에 대하여 많은 팬들과 언론이 호응을 보냈습니다.
 


  

본프레레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뒤 이동국은 본프레레 체제의 대표팀에서 부동의 원톱이었습니다.
사진은 쿠웨이트와의 2006 월드컵 지역예선 첫 경기에서 
멋진 발리슛으로 선제골을 터뜨리는 이동국의 모습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roks821.egloos.com/8000397)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었던 요하네스 본프레레는 이동국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많은 출장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이동국 또한 이에 보답하듯 월드컵 최종예선 1차전이었던 쿠웨이트 전의 발리슛 선제골과 독일과의 친선경기에서 보여주었던 터닝슛 결승골과 같이 멋진 골들을 터뜨렸죠. 뿐만 아니라 이동국은 소속팀에서도 맹활약하면서 4년 전의 설움을 털어내는 듯 했습니다. 비록 지역예선 사우디아라비아 전의 패배로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이 경질되고 새로운 감독에 딕 아드보카트가 선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국은 여전히 대표팀의 4-3-3 포메이션에서 부동의 원톱이었습니다. 아드보카트는 “한국 공격수 중 이동국만큼 뛰어난 선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이동국을 신뢰했죠.
 

 2006년 4월 5일 식목일. 포항의 홈구장인 스틸야드에는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7라운드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동국은 6라운드까지 5골을 넣었고 이번 경기에서도 전반 16분 득점에 성공, 4경기 연속 득점의 쾌조를 달리고 있었죠. 그러던 후반 39분 왼쪽 측면에서 동료의 패스를 받은 이동국은 방향을 전환하다가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우측 전방 십자인대 파열. 이동국은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월드컵에 나갈 것이라며 희망을 걸었지만 완치에만 6개월이 걸리는 이 부상으로 이동국은 8년을 기다린 월드컵 무대를 눈앞에서 놓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아드보카트는 이동국의 대체자로 조재진을 뽑았고 본선무대에서도 1승 1무 1패라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지만 목표이던 16강 진출에는 실패하죠. 그리고 이동국에게는 이제 ‘비운’이라는 낱말이 붙기 시작합니다.


2006시즌 인천과의 홈경기에서 쓰러진 이동국. 
이동국은 독일 월드컵 본선무대 앞에서 또다시 쓰려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대표팀은 본선무대에서 조재진을 이동국의 대체자로 내세웠으나 
결과적으로 16강 진출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이미지 출처 : blog.naver.com/aegisfight)
   

 2007년 1월, 잉글랜드에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동국이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한다는 것이었죠. 이동국을 원하는 팀은 중·하위권 팀인 미들스브로였습니다. 포항과의 이적료 문제로 어느 정도 갈등이 있었지만, 이동국 본인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이적료 없이 포항이 이동국의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허락하는 것으로 이적이 마무리됩니다. 사실 이동국의 프리미어리그 진출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동국은 스트라이커로서 커다란 국제무대 - 월드컵과 같은 - 에서 보여준 활약도 없었고, 불과 3달 전에야 십자인대 부상에서 회복되어 경기에 뛰었을 뿐 아니라 나이도 적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수가 빅리그라고 할 수 있는 프리미어리그로 다른 리그를 거치지 않고 직행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죠. 게다가 이동국은 데뷔전인 레딩과의 경기에서 특기인 발리슛으로 골대를 맞추는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면서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데뷔전에서 골포스트를 맞춘 것이 오히려 불운의 시작이었을까요. 이동국은 충분한 출장 시간을 갖지 못하고 교체선수로만 출장하면서 공격포인트를 쌓지 못합니다. 사실 미들스브로의 공격진에는 미도·비두카·야쿠부 등의 쟁쟁한 선수들이 이동국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프리미어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을 이동국이 밀어내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에 더해 이동국도 프리미어리그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에서 밀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등, 미들스브로가 원했던 공격수의 모습, 더 나아가 프리미어리그에서 뛸만한 공격수로서는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동국의 프리미어리그 도전은 정규리그 데뷔골 - 이동국은 컵 대회에서만 2골을 넣은 것이 잉글랜드 시절 넣은 골의 전부였습니다 - 도 넣지 못한 채, 실패로 귀결되고 맙니다.


 
중소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장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한 이동국이었으나 
이동국의 해외진출은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동국에게는 알폰소 아우베스와 알리아디에르, 미도, 마크 비두카 등의 너무나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았고
또한 중하위권 전력의 미들즈브러에겐 이동국에서 많은 기회를 허락하지도 않았죠.
 
 

 결국 07-08시즌을 끝으로 미들스브로에서 방출된 이동국은, K리그로 복귀하기 위해 친정 팀인 포항 뿐 아니라 대전, 수원 등과 접촉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선수등록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서야 성남에 입단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이동국의 영입이 성남의 감독이었던 김학범 감독이 원치 않았던 영입이었다는 루머까지 있었을 정도로 이동국은 성남에서 13경기 출장(10경기 교체)에 2골 2도움이라는 이동국 답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게 되죠. 우승후보였던 성남 역시 시즌 후반에 극심한 슬럼프로 수원과 서울에 밀려 정규리그 3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플레이오프로 밀려난 성남은 결국 챔피언결정전에조차 오르지 못하면서 2008시즌을 마감해야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올린 김학범 감독이 물러나고 신태용 감독이 부임하죠. 이동국의 성남 입단은 성남으로서도 이동국으로서도 독이 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성남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동국 2008년 초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 … 다만 아쉬운 것은, 성남의 팀 플레이 자체가 외국인 선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점이죠. 제 역할은 외국인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는데 언론의 초점은 저에게 맞춰져 있었고, 따라서 성적에 대한 비난도 제가 받아야 했으니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적응기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환경과 리그에 적응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수준의 차이를 넘어서 일단은 리그 스타일, 팀 전술을 다시 이해해야 하니까요. 익숙한 포항으로 돌아갔다면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전혀 스타일이 다른 팀에서 뛰려니 쉽지 않았습니다.”

 2007-08년은 프로무대에서 뿐만 아니라 대표팀에서도 이동국에게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동국은 2007년 여름, 당시 핌 베어벡 감독이 이끌던 아시안컵 대표팀에 선발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핌 베어벡 감독은 효과적이지 못한 공격전술과 이로 인한 지루한 경기 내용으로 인해 팬들과 전문가들의 많은 비판과 사임 압박을 받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아시안컵 우승이 필요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아시안컵 대회에서도 대한민국 대표팀은 여전히 지루한 경기 내용을 보여주었고 비록 4강전까지 진출했지만 4강에 이르는 5경기에서 3득점이라는 저조한 득점력으로 일관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은 4강전에서 무득점에 승부차기까지 가는 지루한 경기 끝에 4강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3-4위 전에서도 무득점 승부차기까지 가서 일본을 꺾고 3위를 차지합니다.) 대표팀 음주 파문이 일었던 것은 아시안컵 대회가 끝난 직후였죠. 약체로 평가되던 바레인을 역시 무득점 끝에 승부차기로 꺾은 8강전을 앞두고 이동국을 비롯해 이운재, 우성용, 김상식 등 당시 대표팀에서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던 선수들이 룸살롱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이 폭로된 것입니다. 결국 이들 4명은 기자회견에서 눈물로 국민들 앞에서 사고했지만, 1년간 국가대표자격이 정지되고, 2년간 대한축구협회 주관 대회 출전이 정지되는 중징계를 받고 맙니다. 


 아시안컵 기간에 있었던 음주파문에 대해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를 하는 이운재와 우성용.
당시의 저조했던 경기력(5경기 3골)으로 인해 더욱 질타를 받았었습니다.
결국 이 음주파문에 연루되었던 이운재와 우성용, 이동국, 김상식은 
대표선수 자격정지 1년과 2년간 대한축구협회 주관 대회 출전이 정지되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 worldcupblog.org)



 십자인대 파열로 인한 월드컵 출전 좌절, 미들스브로와 성남에서의 실패와 방출, 그리고 국가대표 자격 정지… 많은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이동국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동국이 설 곳은 없어 보였죠.


 2009년 K리그 개막을 앞두고 화제가 된 팀은 단연 전북이었습니다. 전북은 다른 K리그 구단들이 법인화와 경기 침체로 이적 시장에서 돈을 못 푸는 상황에서 대구로부터 에닝요, 하대성, 진경선 등 굵직굵직한 선수들을 영입하고, 성남에서 방출된 김상식과 이동국을 영입합니다. 역시 가장 기대를 모은 것은 이동국이었죠.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스트라이커. 많은 사람들이 전북 감독인 최강희 감독의 선택에 대해서 걱정과 우려의 시선을 나타냈습니다. 이동국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백업 스트라이커도 없는 당시 전북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최강희 감독은 선택은 어떻게 보면 도박에 가까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최강희 감독은 이동국이 전북 공격의 방점을 찍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였습니다. 이동국 역시 2008 시즌을 앞두고 한 <<베스트일레븐>>과의 인터뷰에서 감독에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멘트를 날립니다.


 “부담이라기보다는 저를 믿어주시는 감독님께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지난 몇 년간 마치 강제로 축구를 했던 느낌이라면, 이번에는 제 스스로의 의지가 정말 강해요. 적어도 올 시즌만큼은 정말 잘해보고 싶습니다.”  

K리그 2009 시즌 MVP, K리그 2009 시즌 베스트 11, 리그 29경기 20골로 리그 득점왕, K리그에서 20골 이상을 넣고 득점왕에 등극한 역대 네 번째 선수…

앞서 열거한 이 수상 목록과 기록들은 2009시즌 이동국의 수상 목록과 기록입니다. K리그 2009시즌은 전북과 이동국의 시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2라운드 대구와의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시작한 이동국의 골 퍼레이드는 시즌 내내 계속되었고 이 중에는 광주, 제주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해트트릭도 있었죠. 이와 같은 이동국의 득점력과 이동국을 지원하는 에닝요-루이스-최태욱의 공격진은 ‘판타스틱 4’라 불리며 전북을 상대하는 K리그 팀들에게는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동국의 활약은 점차 여론에서 이동국을 국가대표에 재발탁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 계기가 되었죠.


2009년 K리그를 휩쓸었던 전북의 베스트 11.
이동국 - 에닝요 - 루이스 - 최태욱의 이른바 'F4' 공격진이 시즌 내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2010 월드컵을 앞둔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공격수는 박주영과 이근호로 이루어진 투톱이었습니다. 모나코로 이적한 뒤 괄목한 성장을 한 박주영과 빠른 스피드를 가지고 상대의 빈틈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이근호의 투톱은 분명 위력적이었으나, 문제는 이들이 부상이나 경고 누적으로 빠졌을 경우에 누가 그 빈자리를 메울 것인가가 당시 대표팀이 당면한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스타일이 비슷한 박주영과 이근호를 대신할 공격진의 새로운 옵션의 부재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었죠. 이러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는 중에 박주영, 이근호와는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면서 득점력을 갖춘 이동국이 인상적인 플레이와 골을 기록하고 있었으니 언론과 팬, 전문가들이 모두 이동국의 발탁을 재고해야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입니다. 당시 대표팀 감독을 다시 맡고있던 허정무 감독은 “더 좋은 활약을 펼쳐야한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며 이동국의 기용을 미뤘으나, 결국 2009년 말부터 이동국을 대표팀에 발탁하기 시작하죠. 다시 대표팀에 합류한 초반, 득점을 하지 못하면서 이동국의 대표팀 승선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2010년 2월에 있었던 동아시아 대회 홍콩전과 일본전에서 골을 터뜨린 것에 이어 3월에 있는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 멋진 발리 골을 기록하면서 이동국은 자신에 대한 논란을 불식시킵니다. 
 

 2010년 6월 1일. 아마 이동국에게는 가장 떨리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가 발표되는 날이었죠. 이 날 허정무 감독이 발표한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인의 이름에는 이동국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5월 16일 에콰도르와의 친선전에서 입은 허벅지 부상에도 불구하고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충분히 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발탁한 것이죠. 12년 만에 밟게 된 월드컵 무대. 이동국 본인과 이동국의 팬들에게는 정말 감개무량한 순간이었습니다.


 2010년 6월 27일. 대한민국 대표팀은 사상 첫 원정 16강에 성공하고 우루과이와의 16강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전반 8분 만에 골키퍼 정성룡과 수비진의 미스로 수아레즈에게 선제골을 실점한 대한민국은 이를 만회하고자 실점 이후부터 꾸준히 공세를 가했고, 분위기 역시 대한민국 쪽으로 서서히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점골은 나오지 않았고, 허정무 감독은 후반 16분 미드필더인 김재성을 빼고 이동국을 투입하면서 동점골에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동국의 남아공 월드컵 출전은 우루과이 전이 두 번째 출전이었지만, 사실상 우루과이 전이 제대로 된 첫 출전이라고 할 수 있었죠. 첫 번째 출전이었던 아르헨티나 전에서는 이미 승부의 추가 기운 이후에야 투입되어 10분 남짓 뛰었기 때문에 이동국의 출전이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루과이 전 이동국의 활약에 대해서는 역시 두 가지 의견으로 갈립니다. 마치 글 도입에 말했던, ‘동까’와 ‘동빠’들의 논쟁처럼. 저는 다른 장면들보다 단 한 장면으로 이동국의 움직임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이 끝나고 허탈해하는 이동국.
이동국은 후반 42분 결정적인 기회를 맞았으나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동국의 8년을 기다린 월드컵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 thastar.blogs.com)

 대한민국은 후반 23분 세트피스에 의한 이청용의 헤딩 동점골로 따라붙었으나 후반 35분 수아레즈에게 또다시 절묘한 감아차기 슛으로 실점, 점수 상으로는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경기 중간에 비까지 오면서 양쪽 선수들 모두 지쳤으나 그래도 더 많은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선수들이었고 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정도로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었죠. 그러던 후반 42분, 결정적인 동점골 기회가 찾아옵니다. 박지성이 우루과이 수비진을 꿰뚫는 스루패스를 이동국의 발 앞에 갖다 주었던 것입니다. 박지성의 패스가 가는 순간 우루과이 수비진이 오프사이드라며 손을 들었으나 부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고, 이동국은 골키퍼와 단번에 일대일 상황을 맞았죠. 그리고 회심의 슛. 이동국의 슛은 벌어져 있는 우루과이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를 노리고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공은 야속하게도 우루과이 키퍼의 다리를 맞으며 굴절되어 힘없이 우루과이 골문을 향해 굴러갔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우루과이 수비수가 와서 공을 걷어냈죠. 힘이 조금만 더 들어가 있었더라면,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키퍼의 다리를 맞았더라도 들어갔을 법한 슈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찬스를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는 더 이상의 결정적인 찬스는 오지 않았죠. 

 애써 이 장면을 설명한 것은 이동국을 속된 말로 ‘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일단 먼저 볼 것은 이동국의 움직임입니다. 이동국은 박지성의 스루패스를 받기에 최적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절묘하게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면서 일대일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박지성이 패스를 잘 줬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루패스가 완성되려면 공격수가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단순히 게임 위닝 일레븐만 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스크 파브레가스나 리켈메가 절묘한 스루패스를 뿌려도 공격수가 제 위치에 없다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이 장면 이전부터 이동국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중볼을 따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동국은 자신의 장기 - 위치선정과 움직임, 포스트 플레이 등 - 를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만들어놓고 이동국은 마지막 찬스에서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슛으로 찬스를 날려버리고 말았죠. 혹자들은 말합니다. ‘공격수는 골로 말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동국은 실패한 공격수입니다. 결정적인 찬스를 놓쳤으니까요. 하지만, 이전까지 이동국의 좋은 움직임, 찬스를 만들어 냈던 그 움직임까지 실패라고 한다면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굳이 제가 이 장면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이 장면 때문에 그전까지 보여주었던 좋은 플레이 -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골을 만들어내기 위해 위치선정해 들어갔던 플레이 - 까지 욕을 먹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는 후반 42분의 그 찬스에서 통쾌하게 골을 넣어주길 바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동국이 자신에 대한 비난을 모두 날려버리고 비상하길 바랐죠. 하지만 이동국은 골을 넣지 못했고 그와 대한민국 대표팀의 월드컵은 그곳에서 끝났습니다. 이동국은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고 실패한 공격수가 되었죠. 이동국은 경기가 끝나고 믹스트존을 나오면서 “허무하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심정.”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12년 동안 월드컵 무대를 기다려왔는데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라고 말했죠. 아마 보는 사람들 모두가 안타까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때나마 자신을 대한민국 축구의 대들보로 만들어주었던, 그 월드컵 무대에 다시 서기를 이동국이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하지만 이동국은 두 경기 47분만을 뛴 것이 남아공 월드컵 무대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허무하다’라는 말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이동국은 전북으로 돌아왔습니다. 2010시즌 그는 허벅지 부상으로 리그 경기 일부를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만 13골을 득점했고, 전체적으로는 총 40경기에 출전해서 18골을 득점했습니다. 소속팀 전북은 비록 리그 2연패에는 실패했지만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8강, 리그컵 준우승, K리그 3위 등 비(非) 수도권 팀으로서는 제주 유나이티드와 함께 눈부신 성적을 올렸죠. 이제 전북은 더 이상 K리그의 중위권을 전전하는 팀이 아니라 언제든 우승을 노릴 수 있는 강팀 중의 강팀이고, 그 중심에는 이동국이라는 스트라이커의 존재가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고교를 갓 졸업하고 K리그에 데뷔했던 소년이 14년만에 100호골을 달성했습니다.
이동국의 올 시즌 득점 페이스를 감안하면 현재 인천 코치로 있는 우성용의 
K리그 역대 최다득점을 
경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미지 출처 : 전북현대모터스 공식 홈페이지)


 2011시즌 3라운드, 전북은 부산을 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전반 17분과 30분, 전북은 양동현과 임상협의 골로 2-0으로 앞서나갔죠. 전북은 부산의 빠른 공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전북을 살린 것은 바로 이동국이었습니다. 이동국은 두 번째 골을 허용한 직후인 전반 31분 감각적인 왼발 슈팅으로 만회골을 넣었고, 그것은 이동국의 감격적인 K리그 통산 100호 골이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5월 26일 현재, 7골 5도움으로 득점 뿐 아니라 도움까지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공격포인트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동국은 K리그에서 손꼽히는 S급 공격수이며 많은 수비수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는 공격수입니다. 또한 이러한 점만 봐도 저는 이동국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동국은 2002년 엔트리 탈락 이후 너무나 저평가 되고 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선수이니까요. 
 

 이동국을 유난히 아꼈던 황선홍은 이동국과 많은 면에서 닮아있는 선배이기도 합니다. 이동국의 활동량에 대한 질문에 ‘내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마무리는 동국이가 하면 된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던 황선홍은 94년 미국 월드컵에서의 많은 실축들과 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34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활약한,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선 진정한 스트라이커이기도 하죠. 저는 이러한 황선홍의 자취를 이동국이 따라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 이동국의 나이는 31살이고, 다음 월드컵 때 이동국은 황선홍이 힘차게 날아올랐던 나이보다 고작 한 살 더 많은 35살입니다. 저는 2014년까지, 시련을 극복해내고 기어코 부활한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아직도, 월드컵을 향한 라이언 킹의 도전은 진행형이니까요. 끝으로 이동국이 EPL로 진출하며 한 말 한마디로 Fever Pitch를 마치겠습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는 온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ko.wikipedia.org) '이동국' 항목

- K리그 기록실 선수개인기록 '전북' - '이동국'

- 베스트일레븐 2009년 3월호 이동국 인터뷰

- 티스토리 블로그 thinkallthings.tistory.com/entry/월드컵 이동국_비난이_불편한_이유 ‘[월드컵]이동국 비난이 불편한 이유

- 티스토리 블로그 sapientis.tistory.com/157 '이동국을 욕하지 마라‘

-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pavlov03/80108553301 '이동국, 그를 추억해본다‘

- 네이버 뉴스 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etc&oid=047&aid=0000033841 '성숙해진 이동국“월드컵 시련이 약 됐어요”

- 히딩크 자서전 <<My Way>>

- 홍명보 자서전 <<영원한 리베로>>




벌써 이 글 쓴지 2년이 다되가네
밑에 전문화의 길 어쩌구 써있는데 지금 당장 뭘 쓸 여력은 안되서
일단 가져와봄
사진 그대로 복붙했는데 잘 나오려나 모르겠다 ㅋㅅ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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