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2008.02.22. 금
아버지는 학교 근처에 있는 원룸을 마련해주었다. 기숙사는 이미 입학이 확정된 애들로 꽉 찼기 때문이었다. 수강 신청도 하고, 공부를 좀 하겠다고 노트도 새로 장만했다.(그 화형식 때 왜 새 노트들도 불 태웠는지 잘 모르겠다. 필기도구도 같이…….) 이 다짐이 지켜질 거라고는 생각도 안한다.
그리고 어떤 루트로 알게 되었는지, 같은 신입생 남자애들 3명이 싸이월드 일촌 신청을 걸어왔다. 덕분에 60여 명의 과 동기를 알게 되었다. 물론 합격 후 1주일 사이에 동기애들과 완전히 친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마침 토요일에 몇몇 아이들이 학교 술집에서 모이자고 한 것을 듣고는, 나는 당연히 애들도 알아볼 겸 알았다고 말을 한 후 서로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연락도 했었다. 문제는 60명의 과동기 중 여자애들은 약 60%인데, 이 중 단 한명도 제대로 된 연락(단순한 싸이월드 일촌 추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평소와 다름없이 나는 대충 라면을 끓여먹고(미리 사 놓았던 전공 서적은 어느 사이 라면 그릇의 깔개가 된지 오래다), 네이트온을 켜두고 FM[각주:1]을 하고 있었다.
혼자 바둑알처럼 생긴 선수들의 움직임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아, 무투가 저 위치에 있었어야 했어. 몬톨리보가 잘 찔러주면 뭐하냐고!”
이탈리아 세리에A에 속한 피오렌티나로 트레블[각주:2]을 넘어서 쿼트레블[각주:3]을 노리고 있는 중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경기는 패했고, 나는 짜증이 나서 로드 신공[각주:4]을 사용하려고 했다.
그 순간, 한 통의 쪽지가 'FM'창 위에 나타났다.
‘보내는 사람 : 김은경 / 안녕? 너 수훈이니? ㅋㅋㅋ 맞으면 나 뭐 물어볼 것 있는데…….’
“은경이라, 누구지?”
분명히 일촌 수락과 네이트온 친구 추가만 하고 서로 아무런 접근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답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 앞서서 싸이월드부터 먼저 확인을 했다.
메인 스킨은 나를 ‘풋’ 하면서 웃게 만들었다.
수원 로고가 한쪽 귀퉁이에 있는 파란색 스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왼쪽 아래에 있는 이름 밑 생년월일이었다.
‘1988.10.29.’
88년생. 나보다 한 살 위였다.
답장을 반말로 ‘응’이라고 해야 할지, ‘네’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동기니까, 학번제로 가니까, 나는 ‘응’이라고 대답을 했다.
몇 초 뒤 갑자기 채팅창이 켜졌다.
‘김은경 : 너, 선배님한테 처음부터 반말로 나가네?’
‘맙소사’라는 생각에 급하게 싸이월드 'Photo' 메뉴를 클릭했다. 폴더엔 ‘영어과 07학번’이라는 제목이 써져있었다.
방금 먹은 라면이 올라올 것 같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게 진작 일촌 수락한 사람들 싸이는 다 들어가서 확인했어야 했는데, 선배님한테 완전히 처음부터 찍히는구나!’ 생각을 할 때였다.
‘김은경 : 내 말 씹는 거니?’
상황이 커지기 전에 변명할 거리를 생각해봤다.
‘컴퓨터를 껐다 켤까?’
‘아니. FM 저장을 안 했는데 끄면 10시간을 넘게 저장 안 한 내 트레블 기록은 사라지는 거야. 자동 저장을 왜 안 한 거야!’
‘그럼 네이트온을 끄면 되잖아’
‘아냐. 그럼 뭔가 이상해보여. 그럼 이렇게 해야지.’
‘이수훈 : 엇, 선배님. 안녕하세요. ^^ 죄송해요. 멀티로 쪽지 보내다가 잘못 보낸 것 같네요. ㅎㅎ 물어보시려는 게 뭔가요?’
이 정도면 훌륭한 변명이었다. 30여 초가 넘게 흘러서 한 대답이었지만 말이다.
‘김은경 : 왜 이렇게 대답이 늦은 거야?’
‘이수훈 : 아……. 게임하다가 렉이 걸려서 대답이 늦었어요. 미안해요.’
맨 처음부터 이 변명으로 나갈 걸 그랬나보다. 선배님은 본격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김은경 : 다름이 아니라 내일 가는 애들 있잖아. 술자리에 말이야. 몰래 08인 것처럼 위장하고 갈 거거든. 내가 07인 줄 아는 사람은 너랑 몇몇 애들밖엔 몰라.’
‘이수훈 : 네, 알겠어요.’
‘김은경 : 처음 볼 때 편하게 말 놔도 되니까 그렇게 말고 ㅋㅋ, 너무 긴장하지 마.’
‘이수훈 : 네, 저기 있잖아요. 선배님.’
‘김은경 : 선배님이라고 하니까 부담스럽다. 이제 막 2학년인데 ㅋㅋ 그냥 누나라고 해. 왜?’
‘이수훈 : 음……. 누나, 혹시 수원 팬이세요?’
‘김은경 : 응. 왜? 너 혹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나를 패닉 상태로 만드는 한 마디.
‘김은경 : 북패[각주:5]니?’
‘이건 무슨, 내가 북패라니?’
어느 한 드라마에서 나온 절규의 한 마디가 생각났다.
‘이수훈 : ㅎㅎㅎ 아뇨. 제가 내일 무슨 옷을 입고 오는지 보시면 알 것 같아요.’
이 누나도 내 싸이월드를 들어간 적이 없었나 보다. 사진첩에 이번 시즌의 주장인 송종국 선수의 마킹이 되어 있는 어센틱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은경 : 그래. 내일 보자. 전화번호는 010-XXXX-1995, 문자 보내. 난 약속 있어서 가볼게.’
이러고는 내 인사는 받지 않고, 채팅은 오프라인 상태라는 표시를 남긴 채 끝이 났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수원 팬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는데, 하필 선배 누나 일 줄이야. 은경이 누나의 싸이월드를 뒤적거려봤다. 폴더엔 아까 발견한 ‘영어과 07학번’말고도 ‘Suwon Bluewings’ 폴더가 있었다.
들어가 보니, 이 누나, 매우 열정적인 서포터인 것 같았다.
조그마한 ‘청백적’ 무늬의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모습.
그리고 누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랑 같이 단체 사진을 찍은 걸 보면서, 매점에서나 경기를 볼 수 있었던 나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아무튼 내일이 기다려졌다.
새로운 동기들을 보는 것보다 어쩌면 다른 이유 때문에…….
04 / 2008.02.23. 토
오후 2시에야 눈을 떴다. 밤새 ‘FM’을 했기 때문이었다.
피오렌티나와 동시에 투 잡으로 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을 2010년 월드컵 정상으로 올리기 위해 수많은 로드 신공을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조별 예선에서 첫 상대 프랑스를 상대로 어떻게 박지성의 패스를 이근호가 골로 성공시켜 1:0 승리를 만들었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파라과이를 맞이해 산타 크루즈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면서 3:0 패배. 게다가 다음 상대는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한 다섯 게임 정도 ‘로드 신공’을 펼치다가 결국 0:0 무승부. 우여곡절 끝에 경우의 수로 대한민국은 16강에 진출했다.
16강 상대는 예상대로 반대쪽 1위인 잉글랜드였다. 첫 경기에서는 웨인 루니의 골로 1:0 패배. 불러오기를 한 이후에 조원희가 어언 일로 중거리 골을 넣었지만, 리오 퍼디난드와 스티븐 제라드의 골로 2:1 역전 패. 세 번째 경기에서는 먼저 시오 월컷에게 한 골을 먹었지만, 88분 이영표의 골로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2006년 독일 월드컵 때와 마찬가지로 승부차기로 패하게 되었다.
8강은 쉽게 한 판으로 끝냈다. 상대는 멕시코. 전반 10분 만에 박주영이 첫 골을 넣었고, 후반 10분엔 이정수의 헤딩 골로 2:0 완승을 이끌어 냈다.
이때까지의 시간은 새벽 4시. ‘그래, 끝장을 보자.’라는 생각에 4강전, 이탈리아를 상대로 6판을 다시 했고, 그러고 나니 5시 30분.
결승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내 전술상의 무언가 착오가 있었는지, 또 5판을 내리 ‘로드 신공’을 통해 결국 또 한 번의 승부차기로, 월드컵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순간에, 나는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은 6시, 집 근처에 있는 호프집이었다.
눈을 뜨니 나의 핸드폰엔 5건의 문자가 와 있었다. 3건은 스팸 메일이라 가볍게 제치고, 나머지는 은경이 누나로부터 온 문자였다.
‘야, 오늘 약속 인거 알지? AM 9:45’
한참 잠을 자고 있는 시간대여서 답장 보낼 일이 없었다.
‘너 또 씹는 거니? AM 9:55’
뭐 지금이라도 일어났으니 문자를 보내야 했다.
‘누나, 미안해요. 지금 일어났어요.'
이 정도면 간단한 문자 아닌가. 그러나 보내자마자 내 폰에선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였다. 그리고 그 번호는 은경이 누나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야. 누가 지금 일어나래?”
‘누가 지금 일어나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누나, 저 진짜 지금 일어난 거 맞고요. 그렇다고 화를 내시면 안 되죠.”
“아 몰라, 그건 그렇고, 너 지금 어디야?”
“여긴 제 방이요. 저 학교 근처 원룸 살아요.”
“어, 그래? 오늘 저녁에 문자 너가 봤으면 알겠고. 어제도 이야기 한 거고. 꼭, 조심해. 알았지?”
“알았어요. 저기 누나. 시간이 된다면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잠깐 만날래요? 근처 스타벅스로요.”
“그래, 어차피 내가 할 이야기도 있었어. 어디보자. 지금이 2시 넘었으니까, 4시에 만나자. 그럼 좀 있다 보자.”
그러면서 전화는 자동으로 끊어졌다.
‘이렇게 차가울 수가…….’
나는 그러곤 다시 누워서 잠을 잤다.(‘세상에나!’)
세시 알람을 맞춰 놓고선 말이다.
문제는 내가 잠을 자면 좀 깊게 잔다는 것이었다.
일어나보니 시계는 어느덧 오후 3시 30분.
스피드로 씻고 난 뒤, 수원 트랙탑을 입고 밖에 나온 시간은 약속 시간 5분 전이었다.(스피드로 씻은 것도 아닌가?) 스타벅스 앞까지 뛰어가는데 한 3분이 넘게 걸린 것 같았다.
‘첫 만남인데 늦으면 안 되겠지?’라는 생각에 평소에도 느릿느릿 걸어 다니던 내 모습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은경이 누나는 현장에 와 있었다.
- ‘풋볼 매니저(Football Manger)'게임의 준말이다. 바둑알(2009년 이후 버전부터 3D로도 나온다) 선수들이 징그럽게 움직이는(필자의 어머니 말을 인용) 것이 게임에 전부는 아니다. 선수의 영입, 훈련, 관리 등을 하면서 단순히 시뮬레이션을 넘어 축구판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해주는 유럽에서는 이혼을 할 정도로 중독성이 대단한 게임이다. [본문으로]
- 한 구단이 정규리그, FA(축구협회)컵, 지역별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3관왕) [본문으로]
- 위에 말한 트레블의 기준에 리그컵 혹은 클럽 월드컵, 기타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경우에 쿼트레블이라 일컫는다. (4관왕) [본문으로]
- 미리 놓쳐서는 안 될 게임 전에 저장을 한 후 패할 경우 다시 불러오기를 하는 것을 일컫는다. 트레이너, 핵 프로그램(예 : FMM)을 이용하면 ‘FM’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잘못 하다가 ‘덤프 크래시’라는 저장된 게임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초유의 사태를 낳게 된다. [본문으로]
- 이 소설에 어떻게 이 이야기를 담아야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2004년 시즌 개막 전 ‘안양 LG’ 구단이 기업 논리 등의 이유로 안양 팬들을 버린 채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게 된다. 차마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연고지 이전이었고, 팬들을 버리는 행위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그러짐, 또는 현상(국어사전)’의 뜻인 ‘패륜’에 비유하여, K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FC 서울’ 구단을 ‘패륜’ 구단이라고 부르고 있다. 2006년 ‘부천 SK’가 또 다시 같은 이유로 제주도로 연고지 이전을 하자 ‘남과 북’쪽에 위치한 양 패륜으로 타 팀 팬들은 지칭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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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http://kffactory.com/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