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남자, 서울 여자.
- 너와 나 그리고 세 번의 슈퍼매치
- 1장. 선수 입장
“에이, 아니에요.”
상대방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현우는 뜨끔했다. 안 그래도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등이 땀으로 젖었는데, 이젠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 무슨 말을 해야 되긴 해야 하는데 떠오르질 않았다.
“응원 도구들 가져왔습니다!”
현우를 구한 건 민아였다. 한 손에는 북을 다른 한 손에는 노끈으로 줄줄이 꾄 부부젤라를 들고는 개선장군처럼 방방 소리쳤다.
“두 사람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민아는 자신의 바로 밑 계단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현우와 익종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냥 이야기 하고 있었어.”
“네, 그냥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이야기”
익종은 고갤 돌려 민아 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현우도 적극적으로 익종의 말을 되풀이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차츰차츰 서포터즈 석을 채웠다. 민아는 현우를 끌고 서포터즈 단상 앞으로 갔다. 익종과 그 무리도 그 옆에 위치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익종 무리와 민아는 목이 터져라 팀을 응원했다. 현우는 입 속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웅얼거리면서 따라했다.
“ㅇ...오, 서..서울…….”
입술은 더듬더듬 웅얼거렸지만, 민아를 향한 시선만은 또렷했다. 급박한 경기상황에 서포터즈 석 모든 사람들이 경기장 위 선수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때 현우는 은근슬쩍 민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민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현우는 그런 민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 한 편을 누군가가 베어 무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 좋은 아픔이었다. 경기 상황에 맞춰 얼굴을 봤기에 자신이 민아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더욱더 기분 좋았다.
경기는 서울의 3-1 승리로 끝났다.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한 서울 서포터들은 싱글벙글 미소가 가득했다. 민아와 익종 무리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현우를 환영한다는 목적 하에 회식을 하기로 결정하고는 고기를 먹으러 갔다.
현우는 식사를 끝마칠 때 쯤 용기를 내 익종과 민아의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민아에게 먼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 익종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면서 겸사겸사 물어보니 민아는 웃으면서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다. 취기로 인한 웃음인지, 자신의 말로 인한 웃음인지는 몰랐지만 어째 됐든 기분이 좋았다.
현우는 눈을 감고 오늘 하루를 회상했다. 자신이 싫어하는 FC서울을 응원했지만, 기분 좋은 하루였다. 만약 이 사실이 그랑블루 동료들에게 알려지면 현우는 큰 곤욕을 치룰 수도 있었지만, 일단 골치 아픈 생각은 젖혀두기로 했다. 현우는 더욱 더 깊숙이 소파에 파묻혔다. 가죽 소파는 뻑뻑한 소리를 내며 현우를 감싸 안았다.
“아, 맞다!” 몽롱한 상태에 빠져 곧 잠에 빠질 것 같았던 현우가 벌떡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약, 약, 약을 안 먹었네.” 현우는 부엌으로 가 식탁 위 약 통에서 캡슐 두 개를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까먹을 뻔 했네. 가뜩이나 오늘 짠 음식을 많이 먹어서 걱정했는데.”
현우는 메니에르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본래 메니에르 증후군은 40대에서 60대 중년층이 걸리는 병이다. 그러나 소수의 젊은 사람들이 이 병에 걸리기도 하는데, 현우는 그 중에서도 어렸다. 병의 정도도 심한 케이스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병이 심해져 자주 입원을 하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이 발작성 어지럼이 일어나면 평균 20 - 30분으로 그치는 반면에 현우는 수 시간 동안 지속됐다. 메니에르 증후군은 내림프수종을 동반해서 찾아왔기에 본디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던 현우로서는 더욱더 곤욕을 치렀다.
자신의 허약한 체질은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현우는 항상 생각했다. 현우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현우가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현우가 태어나기도 전에 병사(病死)하셨고, 어머니 또한 현우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 심장발작으로 돌아가셨다. 현우는 이모네 집에서 살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곧바로 독립했다.
병원에서 만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여차저차 대학을 나와 현재는 프리랜서로 편집자 일을 하고 있다. 원래는 중견 출판사에 정규직으로 근무했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어지럼으로 인해 프리랜서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건 출판사 시절 현우가 워낙 꼼꼼한 편집자로 소문이 났기에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상태다.
현우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카카오 톡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새로운 친구’로 뜬다. 가만 보니 민아는 자신의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하고 있었다. 현우는 민아의 프로필을 클릭해 사진을 크게 했다.
현우는 민아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행여나 휴대폰을 잘못 눌러 민아에게 톡을 보내버릴까 조심조심했다.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잘 들어갔냐고 톡을 한번 보내볼까.’
처음엔 ‘오늘 피곤하시지 않으셨어요?’라고 적었다. 너무 오버하는 거 같아서 다시 지웠다. 그 다음은 ‘오늘 즐거웠습니다. ^^’였다. 이건 왠지... 왠지 모르게 찌질한 거 같다. 탈락. 결국은 무난하디 무난한 ‘잘 들어가셨어요?’로 결정했다.
말풍선이 전혀 없는 민아와의 대화방 대화창 일곱 글자를 한참동안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가 보면 언어학자라고 생각할 만큼 열심히 쳐다봤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현우는 코로 크게 숨을 들이켜 입으로 내쉬웠다. 긴 날숨이다. 홈 버튼을 눌러 대화창을 없애고는 탁자 위에 휴대폰을 올렸다.
탁자 위 외로이 눕혀진 휴대폰을 바라보던 현우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두피에 따가움을 느끼고는 손을 내려놨다. 휴대폰은 여전히 혼자였다.
발밑에 구겨져있던 이불을 끌어 와 몸을 덮은 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홀연히 민아의 얼굴이 생각나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현우는 그 날 밤 약 한 시간 동안 ‘민아와 사귀면...’을 시작하는 김칫국을 삼키다가 잠에 겨우겨우 잠에 들었다.
3.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머리카락 물기를 털어내던 민아는 갑자기 ‘풋’ 짧은 웃음을 지었다. 약간은 멍청해 보이던 그 남자가 생각났다. 지하철에서부터 나를 계속 쳐다보던 그 남자, 멍청하게 길을 걸어가다 나랑 부딪히고는 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더듬거리며 FC서울을 응원하고 싶다던 그 남자
*수원 남자, 서울 여자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정기 연재하려고 노력중입니다...
글 = 정재영(spego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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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http://kffactory.com/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