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축구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by 키올프체스키 posted Oct 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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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살다 축구때문에 술을 먹을지는 몰랐다.
더구나 기분이 째져서도 아니라, 이렇게 그지같은 기분일 줄은.
여자때문에도 안먹어 봤는데.

다른 팀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던 적이 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악세사리처럼 여겼던것 같다.
인기없는 리그지만 난 너희와 다르게
이렇게 축구를 사랑해라고.

06년, 처음으로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팀을 티비에서 봤어
스타도 없는 팀의 분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이 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런 그지 ㅈ같은 경우에서야 절실히 깨닫게 되네.
어떤 표정이어야 할까.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어야하나.
하필 이런 경우에 깨달았다고 똥씹은 표정을 해야하나.

기업팀을 빨면서 언젠간 통수를 쳐맞겠지 하고
대비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욕하던 북쪽팀보다 더 ㅈ같은 일을 벌인.
거기에 납득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일관하는 팀을 보며
일그러지는 표정은 어찌해야할까
조롱과 쌍욕 속에서 너네는 얼마나 깨끗하냐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과
같은 소리를 내뱉는 우리팀 팬이라는 한심한 작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만약 우리팀이 아니었다면 신나게 동참했을 나는 참
개새끼였구나.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야자제껴놓고 혼자 열외된 아이의 기분.
공공의 적을 두고 어울렸던 친구들이
어느새 다같이 나를 왕따시키는 기분.
그럼에도 그들의 비난을 묵묵히 받아내야하는 상황에 대한 이해.
차라리 시원하게 맞고 싶다.
차라리 니가 그러면 안되지 하며 뺨을 맞았으면 좋겠다.
딱 그런 기분.
그래도 생각보다 안 혼났네 하고 내심 안도하고 있을
또 다른 내가 속물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

하필 왜 우리는 잘하고 있을까.
이기면 좋은데 이겼다고 좋아할 수 없어.
뻔뻔하게 공홈에서 자위질하는 다른 종자들처럼
그렇게 좋아할 수 없어
그렇다고 또 신이 안나는 건 아니야
미치겠다 정말. 자아가 분열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

우린 남들이 못하는 걸 해.
우린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
자긍심이자 자부심이었던 일들이 자괴감이 되어 괴롭다.
남들과는 다른 길을 이토록 안좋은 쪽으로 걸을 준 몰랐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팀을 보며 좋았던 지난 10년의 세월이 허무해.
신뢰를 보내던 최강희도 의심스러워.
내가 제일 피해자 같은데, 가만히 있다가 똥물을 뒤집어 쓴
다른 팀 지지자들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변명을 해야할지
내가 변명을 하는 게 맞는 건지. 닥치고 있어야하는게 맞는 건지
이러다 덜컥 우승이라도 하면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선수들을 보며
박수를 쳐야할지, 뻔뻔하다고 손가락질을 해야할지
정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미친짓을 그만둬야겠어 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내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안된다.

내 애정을 이딴 식으로 확인하게 될줄은 몰랐다.
그래서 어떤 표정으로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