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쓴 곽희주 얘기 정리 좀 해봤다.

by 낙양성의복수 posted Nov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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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21일.

 

  더벅머리의 어린 선수가 빅 버드를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것을 다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81년생. 당시 우리 나이로 23세다. 패기만 넘쳤던 당시의 곽희주가 울산과의 경기에서 처음 피치로 올라섰을 때, 그 천방지축에 가깝던 몸놀림은 물론이고, 앞뒤 재지 않는 플레이 스타일에 수많은 푸른 눈빛들이 흔들렸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식 하고 웃게 된다.

 

  사실 데뷔 시즌이었던 2003년에는 그렇게 크게 팬들이 곽희주를 야생마 같은 선수라고 인식하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곽희주는 강렬하지만 장단점이 확실한 선수'라는 이미지는 2004년에 비로소 생기지 않았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맞는 듯 싶다. 데뷔 시즌에 곽희주는 11경기라는 적지 않은 출장을 했었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시즌을 마쳤다. 문제는 04년 차범근 전 감독이 부임하면서 발생했다.

 

  그것은 차범근 감독의 전술 성향이 김호 감독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확실히 차감독님의 전술은 당시 국내 선수들이 무난히 소화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최근의 국내 팀들도 그 이상의 왕성한 움직임을 요구받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렇게 사정없이 경기장을 뛰어다니고 부딪히다 보면 선수들이 공간을 내주고 거칠게 플레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런 축구를 하면서 적정한 선을 절묘하게 유지하기에는 곽희주는 아직 설익은 선수였다는 것이 문제였고, 아예 기용하지 않기에는 너무 재능 있는 선수였다는 것이 어찌 보면 아이러니다. 전반기의 곽희주는 그래서 둔탁했지만(사실 곽희주를 보고 거칠다, 투박하다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실상 곽희주는 카드와는 별로 큰 인연이 없는 선수다. 데뷔가 10년이 넘었는데 경고가 45장, 퇴장은 하나뿐이다. 여기서 둔탁하다는 것은 경기의 운영을 말하는 것이 맞겠다.), 시즌 전 무단탈퇴까지 감행하며 방황했던 곽희주는 그렇게 수많은 망치와 정을 맞으면서 후반기에 우승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경기장의 사람들이 그 29라는 숫자에 점점 기대기 시작했던 것은.

 

여태까지 수원을 거쳐간 선수 중에서 이운재 이후로 곽희주만큼 우리에게 당연했던 존재가 있었던가.

 

단언컨대 03년 5월 21일 이후 곽희주가 수원을 떠나는 것을 상상했던 이는 여태까지는 한 명도 없었다.

 

 

   곽희주가 우리 눈 안에 비로소 우리의 형제로 들어왔던 2004년 바로 그 순간, 곽희주는 놓쳐서는 안 되는 선수가 되었기 때문이고, 다소 아쉬운 이야기지만 타 팀에서 탐내기에는 살짝 모자란 그런 선수의 모습을 항상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곽희주의 왼쪽 눈이 항상 경기장 밖의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기적인 이야기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남들 다 가는 군대 역시 보내지 않고도 항상 우리의 형이자 동생인 그를 그라운드에 붙잡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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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에게도 이별의 시간은 찾아왔다.

 

사실 이운재가 이적할 때도 생각했었다. 언젠가는 곽희주도 이 피치를 떠날 거라고.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우리는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가슴이 아프리라 생각한다. 빅 버드를 오래 찾았건, 최근에야 오기 시작했건,

 

곽희주라는 이름이 전광판에 나타날 때, 29라는 숫자가 나타날 때 우리는 항상 누구보다도 환호했고,

 

그 커다란 함성소리에 전율하지 않았던 이는 없었으리라.

 

그렇게 크고 무거운 이름이었기에 내려놓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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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해한다.

 

떠나보내기 힘들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곽희주가 청백적의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여러분이 알만한 선수들의 예를 들어보자.

 

맨유의 피터 슈마이켈, 유벤투스의 델 피에로, 뮌헨의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레버쿠젠의 차범근, 레알 마드리드의 금빛 화살 디 스테파뇨, 인테르의 이름 주세페 메아차까지.

 

이들은 모두 위에 쓰여진 팀과는 다른 곳에서 은퇴했다.

 

 

 

슈마이켈의 예만 들어도 이야기는 충분할 듯하다.

 

슈마이켈은 84년 데뷔, 91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여 99년까지 뛰었다.

 

그리고 스포르팅에서 한시즌, 빌라에서 한시즌, 심지어 마지막 시즌은 맨시티에서 골대를 지켜줬다.

 

그렇다고 해서 맨유의 팬들이 슈마이켈을 레전드로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 선택에 대해서 맨유 프런트가 슈마이켈을 팽했다고 생각할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우리도 그들처럼 선수의 새로운 출발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원클럽 맨이라는 것은 선수와 구단의 의지가 20년 가까이 일치해야만 성립하는 매우 희귀한 경우기에

 

구단과 선수의 사정이 각각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존중해주지 않는 것 역시

 

떠나고 싶지 않은 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를 내치는 것만큼 레전드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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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대장이 사정상 연봉을 줄일 수 없는 처지인데, 팀의 재정문제로 인해서 감봉이 불가피하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것은 프런트의 잘못인가? 곽대장의 잘못인가? 그저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레전드에 대한 예우는 그 선수가 은퇴를 어디서 했냐, 몇 구단을 거쳤냐가 아니고,

 

얼마나 구단이 그 선수에 대해, 선수는 구단에 대해 서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팬들 역시 세대가 변해도 그를 계속 존경해줄 수 있느냐에 달렸다.

 

곽대장이 수원의 다른 선수 수준으로 감봉을 결심하고 수원에서 뼈를 묻고 싶다고 했다면

 

구단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잡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랬을 리는 없다.

 

곽희주 수준의 다른 센터백들을 영입하려고 해도 가뜩이나 센터백이 귀한 요즘에는 

 

현재 곽희주에게 주는 연봉으로 영입하기에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구단에서 여유가 없음을 피력했고, 곽대장도 선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아름답게 이별을 택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차마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묵묵히 서있었던 그에게 재계약 할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의아한 조건으로 곽희주에게 재계약을 제시하는 것으로 의사를 전달했을 것이고, 

 

그 내용을 보고 곽희주도 깨달았을 것이다. 현재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곽희주가 우리를 떠난다면 보내주고 싶다. 

 

레전드를 진짜 레전드라고 생각한다면 


곽대장이 선수로써 더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고,

 

오히려 서른셋이라는 축구선수로서는 지기 시작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그 용기를 더 자랑스러워 해야하며, 

 

그런 선수를 발굴해서 응원하고 사랑하고 위대한 선수로 키워 낸 구단과

 

우리 스스로에게 더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은퇴를 어느 팀에서 하건 그에게 가장 소중한 단 하나의 클럽이 블루윙즈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그가 세상을 떠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운재와 함께 수원의 로컬보이 출신 레전드라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난 10년이 아름다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그가 실상 아름답지 않게 팀을 떠나는 것이어도,

 

만에 하나 그 원인이 된 특정 몇명의 운영진에게 조금은 안좋은 감정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구단을 사랑하고 미워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작은 트러블에 불과하다.

 

이룬 역사가 이미 많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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