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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팔달문 안에서 감독 노릇을 하는 서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상위 스플릿에 들어간답시는(물론 가능성은 희박였지마는) 옆집 페트코비치 감독을 하위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승점이 있을까 하고 경기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만나는 감독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이제는 탄천이 오늘내일인 듯한 누런 구단으로부터 승점을 받기로 되었다.

첫 번에 3:0, 둘째 번에 2:2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반년 동안 선두 구경도 못한 서첨지는 일 점짜리 백통화 한 푼, 또는 서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사 점이라는 승점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없는 득점에 조뽕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주장에게 복귀 후의 희망도 불어넣어 줄 수 있음이다.

그의 주장이 인대파열로 절뚝거리기는 벌써 다섯 달이 넘었다. 평지도 아자디를 걷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물론 러닝 한 번 해본 일이 없다. 구태여 쓰려면 못쓸 바도 아니로되, 그는 부상이란 놈에게 한눈이라도 팔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자기의 신조(信條)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따라서 완치까지 독일의 의사에게 출장 여부를 물은 적이 없으니 언제 복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듯이 누워 가지고 일어나기는커녕 새로 스킬볼 하나 못 차는 걸 보면 중증은 중증인 듯. 그의 부상이 이대도록 심해지기는 수년 전에 조지 마이어에 이어 알렉스를 피지컬 코치로 들이고 나서이다. 그때도 오래간만에 선수를 얻어서 수 억짜리 김두현과 이용래를 사다 주었더니 김첨지의 말에 의하면, 오라질년이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약한 무릎과 발목에 대고 굴렸다. 마음은 급하고 근육은 풀리지 않아 채 달아오르지도 않은 것을 그 오라질년이 R리그는 고만두고 무턱대고 움켜서 다리에 주먹덩이 같은 물혹이 불거지도록 당장 은퇴할 듯이 처박질하더니만 그 시즌부터 그네들이 무릎이 땅긴다, 발목이 저린다 하고 눈을 홉뜨고 지랄을 하였다. 서첨지는 열화와 같이 성을 내며,

"에이, 오라질년, 조랑복은 할 수가 없어, 못 뛰어 병, 뛰어서 병, 어쩌란 말이야! 왜 공을 바루 차지 못해!"

하고 앓는 이의 뺨을 한 번 후려갈겼다. 홉뜬 눈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서첨지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하였다. 환자가 그러고도 축구하는 데는 물리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슈팅이 하고 싶다고 감독을 졸랐다.

"이런 오라질 년! 러닝도 못 하는 년이 슈팅은. 또 무릎 나가 지랄병을 하게."

라고 야단을 쳐보았건만, 못 뛰키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인제 슈팅을 시켜 줄 수도 있다. 앓는 감독 곁에서 골에 배고파 보채는 대세(세골먹이)에게 패스를 찔러 줄 수도 있다. 
---승점 사 점을 손에 쥔 서첨지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땀과 눈물이 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기름주머니가 다 된 청백적 수건으로 닦으며, 
경기장 문을 돌아 나올 때였다. 뒤에서 "여보!"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자기를 불러 멈춘 백종철이 하위 스플릿 출신인 줄 서첨지는 한번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감독은 다짜고짜로,

"상위 스플릿까지 얼마요?"

라고 물었다. 아마도 강등권에 있는 이로 전반기 막판 분위기를 이용하여 반등하려 함이로다. 올라가기로 작정은 하였건만, 선수는 없고 승점차도 있고 해서 어찌 할 줄 모르다가 마침 서첨지를 보고 뛰어나왔음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축구화를 채 신지 못해서 질질 끌고, 비록 '키카' 유니폼일망정 노박이로 비를 맞으며 서첨지를 뒤쫓아 나왔으랴.

"상위 스플릿까지 말씀입니까?"

하고, 서첨지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이 와중에 정대세도 없이 그 먼곳을 칠벅거리고 가기가 싫었음일까? 처음 것, 둘째 것으로 고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그리고 집을 나올 제 주장의 부탁이 마음에 켕기었다. 옆집 페감독한테서 부르러 왔을 제 병인은 그 뼈만 남은 얼굴에 유월의 샘물 같은 유달리 크고 움푹한 눈에다 애걸하는 빛을 띄우며,

"오늘은 숏패스 말아요. 제발 덕분에 롱볼로 가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하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며 숨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래도 서첨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냅다 띄워 붙이고 앉았으면 누가 따내 넣을 줄 알아."

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환자는 붙잡을 듯이 팔을 내저으며,

"하지 말래도 그래, 그러면 일찍이 결정내요."

하고 목메인 소리가 뒤를 따랐다.

상위까지 가잔 말을 들은 순간에 경련적으로 떠는 손, 유달리 큼직한 눈, 울 듯한 주장의 얼굴이 김첨지의 눈앞에 어른어른하였다.

"그래, 상위 스플릿까지 얼마란 말이요?"

하고 감독은 초조한 듯이 인력거꾼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같이,

"북패까지 차가 두 점이 있고, 그 다음에는 골득실로 네 점이던가."

라고 중얼거린다.

"이길 생각 하지 말고 승점 석 점만 줍시요."

이 말이 저도 모를 사이에 불쑥 김첨지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 입으로 부르고도 스스로 그 엄청난 용기에 놀래었다. 한꺼번에 승점 삼 점을 불러라도 본 지가 그 얼마만인가! 그러자, 그 승점 벌 용기가 병자에 대한 염려를 사르고 말았다. 설마 올 시즌 안으로 어떠랴 싶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일 제이의 행운을 곱친 것보다도 오히려 갑절이 많은 이 행운을 놓칠 수 없다 하였다.

"지금 승점 삼 점은 너무 과한데."

이런 말을 하며 백종철은 고개를 기웃하였다.

"아니올시다. 승점 차로 치면 여기서 거기가 이십 점이 넘는답니다. 또 이런 힘든 시즌에는 좀더 주셔야지요."

하고 빙글빙글 웃는 감독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러면 달라는 대로 줄 터이니 빨리 가요."

관대한 감독은 그런 말을 남기고 총총히 페널티킥도 내주고 추가골도 내주고 갈 데로 갔다. 그 경기를 이기고 나선 서첨지의 기분은 이상하게 가뿐하였다. 숏패스를 한다느니보다 거의 티키타카를 하는 듯하였다. 공도 어떻게 속히 도는지 돈다느니보다 마치 수비수를 뚫고나가는 크로스 모양으로 미끄러져가는 듯하였다. 급한 마음에 승점도 받아 신명이 나기도 하였다.

이윽고 이끄는 이의 마음는 무거워졌다. 상위 스플릿 가까이 다다른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염려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오늘은 숏패스 말아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런 말이 잉잉 그의 귀에 울렸다. 그리고 병자의 움쑥 들어간 눈이 원망하는 듯이 자기를 노려보는 듯하였다. 
그러자 엉엉 하고 우는 대세의 곡성도 들은 듯싶다. 딸국딸국 하고 숨 모으는 소리도 나는 듯싶다.

"왜 이러우? 역전 당하겠구먼."

하고, 코칭스태프의 초조한 부르짖음이 간신히 그의 귀에 들려왔다. 
언뜻 깨달으니 서첨지는 팔짱을 낀 채 경기장을 멍하니 보고 있지 않은가.

"아, 아"

하고 서첨지는 또다시 팀을 담금질하였다. 경기가 차차 끝나갈수록 서첨지의 손짓에는 다시금 신이 나기 시작하였다. 입을 재겨 놀려야만 쉴새없이 자기의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을 듯이…… 강등권까지 끌어다 주고 그 깜짝 놀란 승점 삼 점을 정말 제 손에 쥠에 말마따나 이십사 라운드나 되는 길을 말춤을 추어가며 질퍽거리고 온 생각은 아니하고, 거저 얻은 듯이 고마웠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제 자판기뻘밖에 안 되는 불쌍한 구단에게 몇번 허리를 굽히며,

"안녕히 가시요."

라고, 깎듯이 재우쳤다.

그러나 구단 버스를 털털거리며 이 일정 중에 돌아갈 일이 꿈 밖이었다. 승점으로 하여 흐른 땀이 식어지자 폼 잃은 선수에서 부상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원정 승점 삼 점이란 것이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 줄 절실히 느끼었다. 경기장을 떠나는 그의 발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젠장맞을 것! 어찌 이 일정을 따라 얇은 선수층을 털털거리고 이끌어간담. 이런 빌어먹을, 제 할미를 붙을 부상이 왜 남의 구단을 딱딱 때려!"

그는 몹시 홧증을 내며 누구에게 반항이나 하는 듯이 게걸거렸다. 그럴 즈음에 그의 머리엔 또 새로운 광명이 비쳤나니, 그것은 '이러구 갈 게 아니라 숭의 골대 근처를 빙빙 돌며 기회 오기를 기다리면 또 승점을 따게 될는지도 몰라.'란 생각이었다. 올해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 한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하랴. 꼬리를 굴리는 행운이 꼭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기를 해도 좋을 만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남일의 등살이 무서워 골대 앞에 섰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는 이전에도 여러 번 해본 일이라 바로 골대에서 조금 떨어져서 포백이 섰는 줄과 권정혁 틈에 조동건을 세워 놓고, 나머지는 그 근처를 빙빙 돌며 형세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얼마만에 때는 왔고 수십 명이나 되는 선수가 경기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 시기를 물색하던 서첨지의 눈에 양머리에 뒤축 높은 구두를 신은 코치인 듯, 감독인 듯한 남정네의 모양이 띄었다. 그는 슬근슬근 그 남자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여보, 승점 아니 필요하시요?"

그 감독인지 감독대행인지 뭔지가 한참은 매우 때깔을 빼며 입술을 꼭 다문 채 서첨지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서첨지는 구경하는 거지나 무엇같이 연해연방 그의 기색을 살피며,

"여보 상위권 애들보담 적당히 해다 드리겠습니다. 시즌 목표가 어디신가요?"

하고 추근추근하게도 그 감독의 들고 있는 포백 라인에 산토스를 갖다 대었다.

"왜 이래? 남 귀찮게."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는 돌아선다. 서첨지는 어랍시요 하고 물러섰다.

전남이 왔다. 서첨지는 원망스럽게 막차 타는 이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일정이 빡빡하게 스플릿 라운드로 움직이기 시작하였을 제 이도저도 아닌 손 하나가 있었다. 굉장하게 좋은 골키퍼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아마 부족한 공격진에 수비 손실도 크다 하여 중위권에서 밀려 내려온 눈치였다. 

서첨지는 대어 섰다.

"하위 스플릿 행을 타시랍시요."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승점 일 점에 중하위권까지 태워다 주기로 하였다. 스플릿행이 끝나가매 그의 맘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졌고 그리고 또 승점차가 나버려서 맘은 다시금 무거워졌는데, 이번에는 ACL 티켓조차 초조해온다. 클럽하우스의 광경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어 이젠 요행을 바랄 여유도 없었다. 나무등걸이나 무엇만 같고 제 컨디션 같지도 않은 선수들을 연해 꾸짖으며 갈팡질팡 뛰는 수밖에 없었다. 저놈의 감독이 저렇게 티키타카에 취해 가지고 이 험한 리그에에 어찌 가노 하고, 이미 하위로 떨어진 사람이 걱정을 하리만큼 그의 걸음은 황급하였다. 

경기도 이제 열 라운드 남짓 남은 게 벌써 시즌 후반에 가까운 듯하다. 아이티전 앞까지 다다라서야 그는 턱에 닿는 숨을 돌리고 걸음도 늦추잡았다. 한 걸음 두 걸음 클럽하우스에 가까워올수록 그의 마음은 괴상하게 누그러졌다. 그런데 이 누그러짐은 안심에서 오는 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이 박두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불행이 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리려고 버르적거렸다. 기적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 팀, 곧 불행을 향하고 달려가는 제 구단을 
제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으니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다고, 구해다고 하는 듯하였다. 그럴 즈음에 마침 파주 NFC에서 친구 명보가 나온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국뽕이 오른 듯, 온 선수단을 국내 최고의 선수들로 꾸렸거늘, 노르탱탱한 얼굴이 바짝 말라서 여기저기 고랑이 파이고 선수도 있대야 선발만, 마치 습자지로 태풍을 막는 듯한 서첨지의 풍채하고는 기이한 대상을 짓고 있었다.

"여보게 서첨지, 자네 경기장 들어갔다 오는 모양일세 그려, 승점 많이 벌었을테니 공격수 하나 내주게."

명보는 날쌘돌이를 보는 말맡에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는 표정과 딴판으로 연하고 싹싹하였다. 
서첨지는 이 친구를 만난 게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다. 자기를 살려준 은인이나 무엇같이 고맙기도 하였다.

"자네는 벌써 한판 한 모양일세 그려. 자네도 재미가 좋아 보이."

하고 서첨지는 얼굴을 펴서 웃었다.

"압다. 해외파 안 온다고 감독 못 해먹을 낸가. 그런데 여보게, 자네왼몸이 어째 물독에 빠진 새앙쥐 같은가? 어서 이리 들어와 말리게."

대표팀은 훈훈하고 뜨뜻하였다. 신호를 보내는 공격수를 볼 적마다 어김없이 찔러오는 짧은 패스, 후방에서 빠지짓 빠지짓 보내지는 긴 패스며, 슈팅이며, 세트피스며, 헤딩이며, 크로스며, 몸싸움……. 이 너저분하게 늘어 놓은 선수진에 서첨지는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할 양이면 거기 있는 모든 선수를 모조리 깡그리 집어삼켜도 시원치 않았다. 하되, 배고픈 이는 우선 급한 승점 삼 점을 쪼이기로 하고 부산 보약을 한 잔 청하였다. 주린 창자는 승점맛을 보더니 더욱더욱 비어지며 자꾸자꾸 들이라들이라 하였다. 순식간에 박종우가 대표팀에 끌려간 부산을 그냥 물같이 들이키고 말았다. 스플릿 첫째 경기를 받아들었을 제 갈길이 급하던 차 부주장이 골을 넣었다. 원원이 비었던 속이라 찌르르 하고 창자에 퍼지며 얼굴이 화끈하였다. 눌러 수뽕 한 잔을 또 마셨다. 서첨지의 눈은 벌써 개개 풀리기 시작하였다. 방금 따낸 승점 삼점을 숭덩숭덩 썰어서 볼을 볼록거리며 또 다음 라운드를 들이라 하였다.

명보는 의아한 듯이 서첨지를 보며,

"여보게 대안도 없이 또 붓다니, 지난번에 자네가 세 골을 먹었네. 승점차가 오 점일세."

"아따 이놈아, 오 점이 그리 끔찍하냐? 올해 내가 승점을 막 벌었어. 참 올해 운수가 좋았느니."

"그래 얼마를 벌었단 말인가?"

"사십오 점을 벌었어, 사십오 점을! 이런 젠장맞을, 골을 왜 안 넣어……괜찮다, 괜찮아. 막 먹어도 상관이 없어. 올해 승점 산더미같이 벌었는데."

"어, 이사람 취했군, 그만두세."

"이놈아, 이걸 먹고 취할 내냐? 어서 더 먹어."

하고는 명보의 귀를 잡아치며 취한 이는 부르짖었다. 그리고, 코너킥을 차는 스물다섯 살 됨직한 중대가리에게로 달려들며

"이놈, 오라질놈, 왜 골을 먹지 않아."

라고 야단을 쳤다. 중대가리는 희희 웃고 명보를 보며 문의하는 듯이 눈짓을 하였다. 서첨지가 이 눈치를 알아보고 화를 버럭내며,

"에미를 붙을 이 오라질 놈들 같으니, 이놈 내가 공격수가 없을 줄알고?"

하자마자 허리춤을 훔척훔척하더니 산토스 한장을 꺼내어 권정혁 앞에 펄쩍 집어던졌다. 그 사품에 그물이 철썩 하며 흔들린다.

"여보게 경기력이 떨어졌네, 왜 슈팅을 막 끼얹나."

이런 말을 하며 명보는 일변 조동건을 쳐다본다. 서첨지는 취한 중에도 공의 거처를 살피는 듯이 눈을 크게 떠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다가 불시에 제 하는 짓이 너무 더럽다는 듯이 고개를 소스라치자 더욱 성을 내며,

"봐라 봐! 이 더러운 놈들아, 내가 승점이 없나, 다리 뼉다구를 꺾어 놓을 놈들 같으니."

하고 화를 내는 와중에 조동건은 장은과 용래가 주워주는 공을 받아,

"이 원수엣 골! 이 육시를 할 골!"

하면서 팔매질을 친다. 의자에 맞아 떨어진 공은 다시 움푹 패인 해자에 떨어지며 정당한 매를 맞는다는 듯이 펑하고 울었다.

경기는 또 추릴 겨를도 없이 말려가고 말았다. 서첨지는 산토스의 입술과 수염에 붙은 땀을 쳐다보고 나서 매우 만족한 듯이 
그 추평강 카드를 또 쓰다듬으며,

"또 돌려, 또 돌려."

라고 외쳤다.

결국 한 골 먹고 나서 서첨지는 명보의 어깨를 치며 문득 껄껄 웃는다. 
그 웃음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경기장에 있는 이의 눈이 모두 서첨지에게로 몰리었다. 웃는 이는 더욱 웃으며,

"여보게 명보, 내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올해 승점을 찾으러 숭의에까지 가지 않았겠나."

"그래서?"

"갔다가 그저 오기가 안됐데 그려, 그래 경기장에서 어름어름하며 승점을 따올 궁리를 하지 않았나. 거기 마침 감독대행이신지 감독님이신지, 요새야 어디 정규직과 임시직을 구별할 수가 있던가. 골을 잡수시고 서 있겠지. 슬근슬근 가까이 가서 승점이나 주시랍시요 하고 삼 점을 받으랴니까 내 손을 탁 뿌리치고 핵 돌아서더니만 '왜 남을 이렇게 귀찮게 굴어!'그야말로 매직이지, 허허!"

김봉길은 교묘하게도 정말 매직같은 같은 전술를 내었다.

"빌어먹을 깍쟁이 같은 놈, 누가 저를 어쩌나, '왜 남을 귀찮게 굴어!' 어이구 소리가 체신도 없지, 허허"

웃음소리들은 높아졌다. 그런 그 웃음소리들이 사라지기 전에 서첨지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다.

명보는 어이없이 주정뱅이를 바라보며,

"금방 웃고 지랄을 하더니 우는 건 무슨 일인가?"

서첨지는 연해 코를 들여마시며,

"우리 ACL 티켓이 날아갔다네."

"뭐, ACL 티켓이 날아갔다니, 언제"

"이놈아 언제는. 오늘이지."

"예끼 미친놈, 거짓말 말아."

"거짓말은 왜, 참말로 날아갔어…… 참말로. 뛰지도 못하는 주장을 클럽하우스에에 뻐들쳐 놓고 내가 골을 먹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죽일 놈이야."

하고 서첨지는 엉엉 소리 내어 운다.

명보는 흥이 조금 깨어지는 얼굴로,

"원 이사람아 참말을 하나, 거짓말을 하나. 그러면 클럽하우스로 가세,가."

하고 우는 이의 팔을 잡아당기었다.

명보의 끄는 손을 뿌리치더니 서첨지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싱그레 웃는다.

"날아가기는 뭐가 날아가."

하고 득의 양양.

"날아가기는 뭐가 날아가, 생떼같이 코앞에 있단다. 정대세도 다 나았고 염기훈도 전역이다. 인제 나한테 속았다."

하고 어린애 모양으로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 사람이 정말 미쳤단 말인가. 나도 가능성이 희박하단 말은 들었었는데."

하고 명보도 어떤 불안을 느끼는 듯이 서첨지에게 또 돌아가라고 권하였다.

"안 날아갔어, 안 날아갔대도 그래."

서첨지는 홧증을 내며 확신있게 소리를 질렀으되 그 소리엔 안 날아간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가락이 있었다. 
기어이 구십 분을 채워서 승점 일 점어치를 먹고 나왔다. 궂은 비는 의연히 추적추적 내린다.

서첨지는 취중에도 전역한 염기훈을 데리고 삼성 재활센터에 다다랐다. 삼성 재활센터라 해도 물론 잠시 쓰는 곳이요, 또 센터 전체를 쓰는 게 아니라 삼성스포츠단 명목으로 빌어든 것인데 비명을 질러대며 한 달에 여럿씩 오가는 터이다. 만일 서첨지가 주기를 띠지 않았던들 한 발을 대문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靜寂)---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에 다리가 떨렸으리라. 삐걱거리는 목발 소리도 들을 수 없다. 헐떡거리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다만 이 무덤 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깨뜨린다느니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게 하고 불길하게 하는 빡빡거리는 그윽한 소리, 유성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날 뿐이다.만일 청각이 예민한 이 같으면, 그 빡빡소리는 마냥 쓸 따름이요, 하하호호하고 웃음 오가는 소리가 없으니, 의욕없이 사인만 하고 있다는 것도 짐작할는지 모르리라.

혹은 서첨지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맞을 놈, 감독이 들어오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이 오라질년."

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 무시무시한 증을 쫓아 버리려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인 까닭이다. 하여간 서첨지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추기 --- 떨어진 사인지 밑에서 나온 먼지내, 빨지 않은 트레이닝복에서 나는 땀내, 가지각색 때가 켜켜이 앉은 환자복내가 섞인 추기가 무딘 서첨지의 코를 찔렀다.

방안에 들어서며 염기훈을 팬들에게 인사시킬 사이도 없이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 오라질년, 주야장천(晝夜長川)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감독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이의 다리를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에 채이는 건 사람의 살이 아니고 나무등걸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때에 빽빽 소리가 응아 소리로 변하였다. 정대세가 들었던 공을 내려놓고 운다. 운대도 온 얼굴을 찡그려 붙어서 운다는 표정을 할 뿐이다. 엉엉 소리도 입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뱃속에서 나는 듯하였다.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시진한 것 같다.

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감독은 주장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까치집 같은 환자의 머리를 껴들어 흔들며,

"이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년!"

"……"

"으응, 이것 봐, 아무말이 없네."

"……"

"이년아, 복귀해도 답이 없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가망이 없나 보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남은 시즌을 보지 못하고 내년만 바라보느냐, 응"

하는 말끝엔 목이 메이었다. 그러자 감독의 눈에서 떨어진 닭똥 같은 눈물이 김두현의 뻣뻣한 얼굴을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서첨지는 미친 듯이 제 얼굴을 김두현의 얼굴에 한데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염기훈을 갖다 놓았는데 왜 우승을 못하니, 왜 우승을 못하니……괴상하게도 올해는 운수가 좋더니만……"

안내

※ 7회 이상의 추천을 받은 글을 모아둔 게시판입니다.
※ (2013년 3월 22일 이전의 글들은 원문이 따로 존재하여 댓글/추천수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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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크풋볼 선정 K리그 30년 잉여 일레븐 19 file title: 강원FC_구roadcat 2013.05.26 3 27221
공지 크풋볼 선정 K리그 30년 베스트 일레븐 10 file title: 강원FC_구roadcat 2013.05.26 8 26612
236 [연고이전의 작은 역사]연고의식, 이전 (2판) 9 title: 포항스틸러스_구알도 2013.10.02 9 1127
235 [연고이전의 작은 역사]연고의식, 이전 16 file title: 포항스틸러스_구알도 2013.10.02 15 2498
» 어시 좋은 날 - 낙양성의복수 25 title: 수원 삼성 블루윙즈_구낙양성의복수 2013.10.01 20 1413
233 [개긴글] 황감전(黃監傳) 전문 12 title: 포항스틸러스_구유콜 2013.10.01 21 1230
232 개인적으로 난 아재팬들을 정말 좋아한다 19 file title: 인천 유나이티드_구뱃놀이가자 2013.09.30 9 1084
231 [개긴글] TV중계에 맞춰 킥오프 시각을 변경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11 Liberta 2013.09.30 21 1010
230 감사합니다. 12 file title: 2015 성남 8번(김두현)스카이석 2013.09.29 24 1639
229 성남시 인수촉구 4차 궐기대회 2 title: 2015 성남 8번(김두현)스카이석 2013.09.28 7 1088
228 내가 생각하는 패륜의 정의 22 title: 수원 삼성 블루윙즈_구하레스 2013.09.27 17 1436
227 성남시 인수 촉구 궐기대회 17 신감독님 2013.09.26 11 39013
226 @부루부루부루 덕에 11인의전사 구경이나 해라 19 file Goal로가는靑春 2013.09.22 13 2360
225 FC서울의 공로는 인정하자. 8 file title: 인천 유나이티드_구계양산도사 2013.09.22 18 2210
224 FC서울팬들에게 너무 뭐라하지마라.. 1 file title: 인천 유나이티드_구계양산도사 2013.09.22 10 2033
223 협회에는 없다! 개발공에 있다! 챌린저스리그! 2 file title: 인천 유나이티드_구계양산도사 2013.09.22 11 2402
222 연맹에는 없다! 개발공에 있다! (2004-2013) 18 file title: 인천 유나이티드_구계양산도사 2013.09.21 17 2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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