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왜 강등을 당했나 (2)

by 부산빠냥꾼 posted Dec 0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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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football.org/best/4348212 (1) 편에서 이어집니다.

 

 

2. 방관하는 회장님과 무능력한 실무진의 앙상블

(원래는 회장님 / 프론트 / 지도자로 목차를 나누어서 글을 쓸까 하였으나, 어차피 이 세 덩어리는 상호 연관되므로 한 챕터 안에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겠다.)

 

 

앞서 1에서 언급한 '세대의 단절'을 보고,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도 있다. .. '세대의 단절, 좋다 이거야. 그런데 K리그에는 아직 부산보다 우승 경험이 없거나, 전통의 명가라는 축적분이 다소 부족한 팀도 많고, 부산 이상으로 젊은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는 팀도 있어. 그런데 걔네들도 부산보다는 훨씬 잘 나가는데?' .. 라고 말이다. 맞다. 부산의 문제는 '세대의 단절',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세대 간 단절이 폭약이라면 기폭장치는 따로 있다. 이제 그 기폭장치에 대한 얘기를 꺼내볼까 한다. 

 

 

우선 시점을 이안 포터필드 감독 시절로 돌려보자. 이 때 당시 부산은 감독의 파워가 막강한 팀 중 하나였다. 감독의 요청으로 선수단 정복을 만든 것도 이 때부터이며, 선수단 정복에 팀 엠블럼을 큼지막하게 박아넣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여기에 클럽하우스 건립과 전용 연습구장 확보, 부산 U-12 → 신라중 → 동래고로 이어지는 유소년 시스템 청사진의 구축, 심지어 우승이와 연승이의 마스코트화까지 모두 이안 포터필드 시절 감독 시절의 성과였다. (물론 이러한 성과 외에, 잘못도 '엄청나게' 많다. 다만 포터필드의 오점은 여기 주제와 연관성이 적으므로 생략한다.) 여하간 이 당시 포터필드 감독은 구단주의 지지 아래 자기 권한을 늘려갔고, 이에 대해 프론트 측은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런 포터필드가 2006년 21경기 연속 무승을 찍고 돌연 사임한다. 제왕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2006ㆍ2007년 즈음부터 부산 아이파크 사무국 내에는 이러저러한 팀 조직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역공헌팀이라든가, 전력강화팀이라든가, 유소년 전담팀이라든가.. 이후 해당 조직의 장으로 부산 태생의 인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꿰차게 된다. 개중에는 아래에서도 언급할 한정국 씨 등 축구인 출신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사실 포터필드 이전까지, 부산은 프론트의 파워가 매우 강한 팀 중 하나였다. 당장 부산 대우 로얄즈 시절의 역사는, 사실상 안종복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안종복 단장의 월권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현대산업개발이 인수한 이후에도 프론트의 월권 경향은 계속되었다. 선수의 영입과 방출, 심지어 전술적인 문제까지 프론트가 개입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심지어 어제까지 수석코치로 감독의 지시를 받던 사람을 하루 아침에 부단장으로 올려놓으며 선수 영입 등에 있어 감독과 대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드는 재주도 부렸다. 요컨대 부산은 감독과 프론트 간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프론트가 감독의 상전 노릇을 하며 동시에 감독에게 견제를 가해온 셈이다. 그것도 몇십년 동안 말이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팀이니 이안 포터필드의 퇴장과 함께, 프론트의 권한은 다시금 늘어나는 쪽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2008년 황선홍 감독이 부임할 즈음에는 대략 단장 (전략기획 및 홍보, 행정) / 전력강화팀 (선수 영입 및 평가) & 유소년 전담팀 (유소년 운영) / 감독 (선수단 관리와 경기 진행) 으로 업무가 분담되는 방식이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일단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모양새는 그럴싸했고, 해외 명문 축구팀들도 구조가 저러하다며 소위 선진화된 구단 행정의 실현이라는 공치사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업무 효율이 바닥을 기었다는 점이다. 당장 예를 들어보자.

 

우선 전력강화팀. 이들의 주요 업무는 선수 영입과 방출, 특히 외국인 선수 영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라고 축구 선수 출신인 한정국 씨를 전력강화팀장에 앉혀놓은게 2008년 무렵의 일이다. 이후 2015년 현재까지 8년동안 총 32명 (2008년 5명, 2009년 3명, 2010년 3명, 2011년 5명, 2012년 3명, 2013년 4명, 2014년 4명, 2015년 5명)의 외국인이 부산에 등록되었다. (일단 연맹 기록 + 내가 기억하는 기준이다. 32명 중에는 재계약해서 재등록 된 선수도 있으며, 내가 빼먹은 선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다 크게 많은 숫자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중에 성공했다고 할 만한 선수는 누가있나? 성공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나마 밥값은 했다할 만한 외국인은 누가 있었나? 닐손주니어, 파그너, 에델, 맥카이.. 꼽아봐야 4명을 넘어가질 않는다. 4/32.. 12.5%의 확률.. 차라리 팬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주고 투표로 선수를 뽑아도 이것보다는 잘하리라 싶을 지경이다. 더군다나 위 성공 사례 중, 닐손주니어는 윤정환 감독이 윤성효 감독에게 직접 추천해줘서 데려온 선수였고, 맥카이는 안익수 감독이 2010년부터 점찍어 두었다가 영입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즉 위 둘을 빼면 전력강화팀의 성공 확률은 2/30, 6.66%로 줄어든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했다.

 

그러나 위 실패에 대해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승률 6.66%의 감독이라면 당장 경질감이겠지만, 외국인 영입 성공률 6.66%는 면죄부라도 쥐어주는 모양. 특히 위에 언급한 그분은 2010년 전력강화팀장을 넘어 사무국장에까지 취임하며 K리그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K리그팀 사무국장이라는 기록도 세웠으며, 2015년 현재에도 전력강화실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계시면서 부산의 강등을 함께하였다. 여기에 영상만으로 선수를 선택해 실패하지 않겠다며 '이번엔' 브라질까지 다녀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잠깐.. 감독이 시즌 중이나 오프시즌에 브라질 등지에 가서 선수를 관찰할 여유가 안되니까 만든게 전력강화팀 아니었나? 근데 전력강화팀이 비디오나 보고 선수를 영입했다고? 이럴거면 차라리 감독한테 비디오를 쥐어주고 골라보라 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전력강화팀은 대체 무엇때문에 필요한걸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어서 유소년 쪽이다. 위에서 언급한 전력강화팀은 그래도, ‘예산부족’이라는 면죄부가 있다. 항상 쪼달리는 외국인 선수 영입 예산으로 선수를 영입해야 하니, 브라질 갈 돈도 아껴야되고 어쩌고저쩌고..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구석이 있다. 그러나 유소년 쪽은 그런 변명조차 할 수 없다. 부산 아이파크는 정확한 내역을 공개하지 않지만, 매년 부산은 운영예산에서 적게는 10% 전후, 많게는 20%를 상회하는 규모의 예산을 유소년 투자에 쏟아부었다. 특히 위에서도 언급한 부산 U-12 → 신라중 → 동래고 라인업을 구성하던 초창기에는 여느 K리그 빅클럽 못지않은 예산을 유소년에 투자했다. 그러니 여기는 예산 부족이라는 면죄부 조차 없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지 아는가? 지금 부산 유소년은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하는 상황이다. 10년의 세월 동안 공들인 탑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야 한다 이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당장 이정협도 있고 구현준, 이청웅, 이창근 등 부산 내 유스 출신들이 많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그렇다. 이러한 자원이 나오긴 했다. 그런데 이 자원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U-12부터 U-18까지 유소년 지도자와 유소년 팀의 안정에 있다. 하지만 2015년 한 해 부산은 유소년 지도자도 팀도 와해되었다. 이유를 설명하겠다.

 

2011년 9월, 부산 아이파크는 U-18 팀으로 동래고와의 협약을 철회하고, 개성고등학교 (구 부산상업고등학교) 축구부와 새로이 업무 협약을 맺는다. 하지만 개성고는 동래고, 부경고 등의 등쌀에 밀려 권역 내에서도 중하위권에 머무는 팀이었던 바, 2012년 K리그 주니어에서 B조 7위를 기록하는 등 앞으로의 험난한 길이 예고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2013년 박진섭 감독이 개성고 지휘봉을 잡으면서 상황은 일신된다. 박감독은 2013년 부임 첫 해, K리그 주니어 준우승(위에도 언급했다시피, 직전해에 동대회 조별예선 7위를 하던 팀이었다.)을 거둔데 이어 이듬해인 2014년에는 협회장배 전국고교축구대회 우승 및 대통령금배 전국고교축구대회 준우승을 기록하며 신흥 강호로 급부상한다. 이어 2015년에는 K리그 주니어 및 전국고등축구리그 왕중왕전에서 우승 후보로 분류되며 팀을 안정화 궤도로 올리기까지 하였다. 3년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였다. 그런데..

 

2015년 7월 박진섭 감독이 개성고 감독에서 부산 아이파크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된다. 문제는 7월이라는 시점. 이 시기 개성고 졸업반 선수들은 대학 진학 or 프로 진출이 걸린 주요 대회를 앞두고 있었으며, (흔히 여름~가을이 스카우트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대회는 선수들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다.) 다음해 U-18 팀에 진학할 옥석을 고르고 스카우트하기 위해 U-18 감독들이 본격적인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개성고 감독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치루어진 K리그 U18 챔피언십에서 부산은 1승 3패를 기록하며 조별예선 탈락, 전국체전 2라운드 탈락, 후기 K리그 주니어 B조 4위를 기록하며 전국고교축구리그 후기 왕중왕전에 참가 자격도 얻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5년 봄에 치루어진 전기 왕중왕전에서는 8강까지 올랐던 팀이, 후기 왕중왕전은 참가조차 못한 것이다.) 이어 2015년 12월에는 박진섭 수석코치가 개성고 감독 복귀가 아니라, 포항으로 이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렇다. 3년동안 박진섭 감독이 쌓은 모든 것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버린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는 2009년, 당시 부산 아이파크는 U-18 팀으로 동래고 축구부와 협약을 맺고 있었다. 당시 동래고 감독이었던 박형주 씨는 5년 가까운 시간동안 동래고 축구부에 몸담으며 동래고 축구부를 궤도에 올리고 있던 차.. 그런데 부산 아이파크 윗선과 박형주 씨는 선수 차출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이다 동래고 감독직을 내려놓고, 포철공고 감독으로 떠나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문제는 아직 동래고 졸업반 선수들의 진로가 정해진 시점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박감독 밑에서 중학교 시절부터 키워진 자원이라는 점이었다. 학원축구는 소위 라인이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선수들 입장에서는 대학, 프로 진출까지 믿고 잡아온 동아줄이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된 셈. 결국 대부분의 선수들은 대학 진학 등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상당수 축구를 그만두고 만다. 유일한 예외였던 최승인 선수도 동래고를 중퇴하고, 쇼난 벨마레에 입단했다가 K3 리그까지 가는 등 상당기간 고생하며 ‘실패한 유망주’란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었으니, 동래고 학부모와 동문회 등은 부산 측에 강하게 항의하였고, 결국 2011년 동래고와의 협약은 종료되고 말았던바 있다.

 

그리고 위의 역사가 지금 현재 반복되고 있다. 즉 10년동안 부산 아이파크는 U-18 팀에 엄청난 돈을 부으면서 2번이나 리셋 버튼을 누른 셈이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