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남자, 서울 여자 2화 즐거운 편지 - 1

by BOT posted Dec 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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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남자, 서울 여자.

 

- 너와 나 그리고 세 번의 슈퍼매치

 

- 2화. 즐거운 편지

 

 

0.

 

축구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동료가 없다면, 상대 팀이 없다면 축구라는 스포츠는 형성이 될 수가 없다. 슈퍼매치 또한 서울과 수원이란 맞수가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너와 나 또한 그렇다. 나 혼자만의 다가감이라면 그건 혼자 벽을 향해 공을 차는 행위에 불가했다. 다가오고, 다가가는 것. 사랑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1.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머리카락 물기를 털어내던 민아는 불현듯 ‘풋’ 짧은 웃음을 지었다. 약간은 멍청해 보이던 그 남자가 생각났다. 지하철에서부터 나를 계속 쳐다보던 그 남자, 멍청하게 길을 걸어가다 나랑 부딪히고는 내 말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거리며 FC서울을 응원하고 싶다던 그 남자. 현우를 떠올렸다.

 

여자보다 더 하얀 얼굴에 약간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경기장에 가서 서포팅을 할 때도 응원구호를 우물쭈물 이야기 하던, 그 와중에도 슬쩍 슬쩍 옆을 바라보는 건 잊지 않았다. 민아는 현우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하는 척하려고 엄청 노력했다.

 

문뜩 고기 집에서 웃어버린 게 떠올랐다. 현우가 전화번호를 물어볼 때 민아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렸다.

 

“아아아!”

 

자신이 멍청하게, 헤벌쭉 웃었을 것을 생각하니 민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다리를 동동 구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여댔다.

 

처음엔 익종의 전화번호만 물어봐서, 내 전화번호는 안 물어볼까 생각하던 찰나 현우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민아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곤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웃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었다.

 

민아는 서랍 위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집었다.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고는 상단 작업 표시줄을 봤다. 카카오톡 아이콘이 떠있었다. 보지 않은 1개의 메시지가 있었다.

 

‘현우의 메시지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민아는 숨을 고르고 카카오톡을 클릭했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친구였다. ‘지금 뭐해’라는 말이 사람의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민아는 대충 답장을 보내고는 현우의 프로필을 클릭했다. 아쉽게도 프로필 사진은 기본 화면이었다.

 

“이 사람 뭐야. 사진 올리라고 만들어 놓은 프로필 사진에 아무것도 안올리면 어떡해.”

 

민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침대 위로 휴대폰을 던져버리고는 자신도 침대 위로 누웠다. 민아가 올라가자 휴대폰은 풀썩 허공으로 떠올라 감색 카페트가 깔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진짜.”

 

민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침대 밑으로 손만 내려 휴대폰을 집었다. 혹시나 액정이 깨지지는 않았을까 유심히 살피고는, 고장이 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켰다. 화면에 빛이 나며 그와의 대화창을 표시됐다.

 

손만 밑으로 내려 주우려다 보니 할 수 없이 화면을 몇 번 만졌는데 하필이면 그와의 대화창이 뜨다니. 두 입술을 오므리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 속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 덩어리가 들끓었다. 눈동자만 살살 위로 굴려 휴대폰 화면을 쳐다봤다. 몇 달 전 보낸 톡엔, 아직까지도 상대방이 확인을 하면 없어지는 ‘1’이 사라지지 않았다.

 

휴대폰이 다시 한 번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번엔 민아의 자의였다. 카페트는 휴대폰을 감싸 안으며 ‘툭’ 소리를 냈다.

 

소리는 방 전체로 스며들었다. 구석구석 소리가 파고들었다. 민아는 귓가를 맴도는 그 소리가 두려웠다. 그만 현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 또한 무서워 져버릴 것만 같았다.

 

민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밤 새 형광등은 꺼지질 않았다.

 

2.

 

“윽”

 

두 팔을 천장을 향해 쭉 뻗어 기지개를 켠 현우의 입가에서 정체 모를 신음이 튀어나왔다. 창밖으론 해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빠끔히 자신의 형체를 들어냈다.

 

현우는 지금까지 작성한 문서를 저장하고는,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작업을 완료했다는 문자 한 통도 잊지 않았다.

 

좌우로 목을 두어 번 꺾어주며 부엌으로 갔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냉장고를 뒤적거려 요플레와 사과 하나를 꺼냈다. 커피포트가 곧 삑삑 소리를 냈다. 현우는 서랍에서 커피 믹스 하나를 꺼냈다.

 

시계는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원래라면 마감을 끝내고, 곧바로 잠을 자는 현우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12시에 민아와 점심 약속이 있다. 지금 자면 제 시간에 못 일어날 거 같고, 일어나더라도 얼굴이 부을 거 같아서 차라리 밤을 새기로 했다.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서랍에서 책을 한권 뽑았다. 현대시 모음집이었다. 책은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했다. 탁자 위에 발을 걸치고, 소파에 앉아 대충 책을 펼쳤다.

 

십여 년 전부터 현우가 보던 책이다. 현우가 처음 입원 했을 때 병원 내 서점에서 이모가 사주신 책이었다. 처음엔 짧은 글로만 이루어진 책에 별 흥미가 가질 않아 서랍 위에 올려놓기만 했다. 현우의 손엔 항상 만화책이나, 판타지 소설책이 들려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시집을 읽게 됐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어지럼증과 치료에 긴 호흡을 요하는 책들은 읽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시를 읽게 됐지만, 그 어쩔 수 없음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싫어하던 시의 짧음에 매료됐다. 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는 글이라는 말이 뭔지 알게 됐다. 독한 약물 치료를 받거나, 어지러움 증이 심하게 찾아오면 읽고 있던 소설이나 만화책의 줄거리를 까먹기도 했다. 그러나 시는 그렇지 않았다.

 

짧음은 영원했다. 단순히 짧기만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짧지만, 짧기만 해서는 아닌 것. 현우는 그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현우가 펼친 장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가 적혀있었다. 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탁자 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시를 조용히 소리 내어 읽었다.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이 시를 썼다. 고등학교 3학년 짝사랑하던 한 여대생을 향한 마음을 시로 승화했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현우는 잘 지은 사랑시라고만 생각했다. 나중에 시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된 뒤로는, 이 시를 가장 좋아하게 됐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연상에 대한 짝사랑. 시를 읽던 현우는 문득 그 누나가 떠올랐다.

 

햇살이 창문을 타넘어 현우의 얼굴에 살며시 다가왔다.

 

*수원 남자, 서울 여자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정기 연재하려고 노력중입니다...

 

글 = 정재영(spego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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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http://kffactory.com/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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